길 위에서 삶을 읽다
“산티아고는 길이고 숲이고, 낙엽이며 바람이다.
걷기는 자연과 대지의 신비를 탐색하는 모노드라마다.
그 드라마는 수고와 기쁨의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리가 수고하면 가슴에는 기쁨이란 이슬이 맺힌다.”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중에서
소설가 서영은 선생과 나를 연결해 준 것은 산티아고 순례기인 이 책이다. 책을 읽고 인터뷰한 후 선생을 자주 만났다. 서울 평창동에 있는 카페 “키미”와 부암동의 손만둣집에서 만날 때마다 선생은 현자처럼 내게 지혜를 주었다 그래서 “선생님”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60년대 후반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선생에 자극받아 나도 걷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서영은이라는 이름이 생소할지 모른다. 그녀는 1980년대 한국 문단에 화제를 뿌린 인물이다.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먼 그대 」를 비롯해 「사다리가 놓인 창」,「사막을 건너는 법」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가장 화제가 된 것은 한국 문단의 거목인 김동리와의 사랑이었다. 서른 세 살의 차이를 넘어 이들은 부부가 됐다. 선생은 김동리의 세 번째 부인으로 1995년 그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세상의 눈초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추구했던 그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추상 명사인 사랑을 동사로 풀이하면 “치러 내다”와 “감당하다”라고 말했다. 육체는 물론 마음까지 잡혀 주는 것,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마음의 칼자루를 끝까지 내주는 것이 사랑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김동리와의 사랑은 운명적이었다. 상대는 존재의 이유였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그녀는 그 사랑을 ‘서사(敍事)’ 라고 표현했다. 긴 세월 속에서 이뤄진 서사라는 것이다.
그 속에 어찌 절절한 사랑만 있겠는가. 미움, 다툼, 지겨움, 원망 등 모든 것이 있었다. 그걸 치러 내고 감당하는 것이 사랑이다. 상처 받을까 봐 마음의 칼자루를 조금 내밀었다가 다시 당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치열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치열해야만 사랑의 바닥이 보입니다. 그 바닥을 보아야만 허망함 때문에 또 다른 가치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상처 입을까 치러내지 못하고 감당하지 않으면 바닥을 볼 수 없다. 바닥에 내려가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치러 내고 감당하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우뚝 서는 지점에 도달한다는 설명이었다.
김동리라는 상대만을 생각한다면 그가 떠난 뒤 남은 건 회한밖에 없겠지만 그로 인해 얻은 또 다른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김동리와의 만남은 섭리였음을 느낀다.
마음의 칼자루를 다 내어 주는 것은 모험이다. 그러나 그녀는 “모험하라. 모든 일을 모험으로 바꾸라.” 라고 강조했다. 그녀에 따르면 현대인의 삶 속에 서사가 없는 것은 모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의 칼자루를 다 내던지는 모험이 없기 때문에 삶이 단조롭다.
그동안 선생은 전 세계 160여개 도시를 다녔다.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언제나 떠날 수 있는 자리에 뒀다고 말했다. ‘산티아고’를 마음에만 두지 않고 그곳을 향해 떠났다. 그녀는 <좋은 생각>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언젠가는 꼭 산티아고를 찾아 떠나 보세요.” 여기서 산티아고는 스페인의 한 지명이 아니다. 미지의 세계이다. 치러 내고 감당하는 추상적인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곳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떠나는 모험을 했을 때만 새롭게 빚어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모험으로 인해 받을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도 부탁했다. 두려움 때문에 평생 한 번도 자기 자리를 떠나 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고 반문했다. 그녀는 살라망카에 머무는 동안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주 무대로 설정한 라만차의 길을 걷겠다고 말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 싸움, 이길 수 없어도 /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 하고 노래하며 돈키호테가 걸었던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김동리를 떠나보낸 이후, 그리고 수많은 길을 걷고 난 뒤 깨달은 사랑의 정의를 부탁했다. 선생은 사랑이 현실로 나타나면 교차점이 된다고 말했다. 수많은 길이 교차하도록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사랑하면 둘만 교차하지요. 그러다가 치열하게 사랑해서 밑바닥을 발견하고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면 삶 속에서 수많은 일이 교차합니다.”
젊은 시절 오직 한 사람과 교차했던 소설가 서영은. 그녀는 67세의 나이에 수많은 길의 교차점으로서 치러내고 감당하는 삶을 산다. 선생은 지금 아마도 살라망카와 라만차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이태형 / 국민일보 부장
(‘좋은생각’ 2010.1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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