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험
공군 조종사였던 블랜포드(Blanford) 중위가 플로리다 훈련소의 군대 도서관으로 보내진 책들 중에서 서머싯 몸의 『인생의 굴레에서』를 읽게 되면서 그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그가 훈련소에서 처음 빌린 그 책 속에는 빼곡이 주석을 적어 넣은 여자 필체의 글들이 가득하였다. 사실 그는 책을 빌려 그렇게 자기 책처럼 무슨 주석을 기록하는 것은 본래부터 싫어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주석 내용은 남달리 특별하였다. 어쩌면 그렇게도 자신의 생각과 똑같았는지... 그는 그 주석을 읽어가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그는 책 뒷장 장서표에 명시되어 있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고 이 전화번호로 그녀의 이름과 주소를 찾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홀리스 메이넬이었다. 그 후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며 두 사람은 서로 더 깊이 알게 되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과 힘이 되어주었으며 마침내 사랑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중위는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어 그녀에게 사진 한 장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언지하에 거절되었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그 중위의 감정이 진정으로 진실되고 가식이 없는 것이라면 외모가 무슨 문제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중위가 단지 외롭고 고독했기 때문에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라면 자신은 매우 실망할 것이라는 사실도 덧붙였다. 그러나 아직은 서로가 자유로운 상태이니 서로가 교제를 끊건 계속하건, 만나서 직접 보고 마음을 결정하자는 통보를 보냈던 것이다.
그녀는 빨간 장미꽃을 달고 뉴욕 맨해튼의 중앙종착역으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이 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을 지나쳤다. 어떤 한 여자가 초록 양장의 멋진 차림을 하고 앞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저랑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그녀는 그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날씬한 몸매, 우아하게 넘실대는 금발의 머리카락, 꽃과 같이 푸르른 두 눈, 부드러운 연분홍의 입술과 탄력 있는 두 볼... 마치 봄이 금방 돌아온 것 같았다. 그 순간, 영혼의 떨림과 욕망의 이끌림을 느끼며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은 간절한 충동이 일기도 했다.
바로 그 뒤 빨간 장미꽃을 단 여인이 눈에 띄었다. 40은 거뜬히 넘은듯한 그녀. 희어져가는 머리칼에 볼품없이 눌러쓴 낡은 모자. 이만저만 뚱뚱하지 않은 몸매, 그리고 밑에 복숭아뼈가 불쑥 튀어나온 발목은 말 그대로 낮은 구두 속에 처박혀 쑤셔 넣어져 있었다.
블랜포드는 섭섭하고 씁쓰름한 감정을 최대한 감추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이렇게 만나기 전가지 13개월 동안이나 자신의 정신적 동반자요, 위로자였다. 또 그토록 동경하고 사모했던 여인이어서 그 감정 또한 매우 애틋하고 깊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부인은 얌전하며 상냥한 얼굴에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녀의 푸른 눈은 인자하고 정답게 느껴졌다. 중위도 그제야 똑바로 그녀를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만남은 더 고귀하고 의미 있는 것인지도 몰라...’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기로 했다. 중위는 그런 생각에 마음에 평정을 되찾았다. 그의 손에는 그때의 책, 『인생의 굴레에서』가 꼭 쥐어져 있었다. 그는 다가가 정중히 말했다.
“저는 블랜포드입니다. 미스 메이넬이시죠? 이렇게 만나주셔서 참으로 기쁩니다. 같이 가서 식사라도 하셔야지요?” 그녀는 약간은 황당한 듯 놀랐다. 그리고 미소를 띠며 이렇게 대답했다.
“젊은이! 무슨 영문인지 잘 모르겠소만 금방 내 앞을 지나간 그 초록 양장의 여인이 내게 장미꽃을 달아주며 누군가를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함께 가자고 할 때 길 건너 식당에서 자신이 기다리고 있음을 전해 달라고 했지요. 사실 무슨 시험을 보는 것 같아요. 내 아들도 둘이나 군대에 있어요.”
소설에는 두 가지 시험 또는 함정이 설정되어 있다. 첫 번째는 메이넬이 꽃을 달지 않고 나와 최종적으로 그의 마음가짐을 시험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나이 많은 여인을 등장시켜 정중히 식사에 초대하게 함으로써 그의 동태가 어떤지를 살펴보게 했다. 블랜포드는 이 두 가지의 시험에 완벽하게 합격했다.
사랑의 선택에 있어서는 반드시 시험의 과정이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간에...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값어치 있고 보배로운 것을 쟁취할 수 없다. 그만큼 귀한 것이기에 사랑을 얻기 위한 시험 또한 험난한 것이고 혹독할 수밖에 없다.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삶의 여정 안에서 시험과 시련은 부딪히기 마련이고, 또한 어떤 모양으로든 극복해야할 과제들임은 틀림이 없다. 사랑을 얻기 위한 시험과 시련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염두해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블랜포드 중위가 보여준 것처럼 진실함과 최선의 마음으로 다다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시험과 함정은 극복되고 사랑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승식 / ‘철학은 빵을 굽지 않는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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