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노후
내가 그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15년 전쯤이다. 스님은 출가한 이래 안거 기간 동안에는 선방에서 정진하고, 안거철이 아닌 때에는 암자를 전전하며 공부하셨다. 함께 출가한 도반들이 제법 큰 사찰의 주지 소임이나 종단의 큰일을 맡아 활동했지만, 스님은 단 한 번도 그런 소임을 맡으신 적 없었다. 공부 외에는 어떤 소임도 거절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고 자못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이후로도 1년에 몇 차례씩 만나 좋은 말씀을 듣곤 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소식이 끊겼다. 그렇게 몇 년을 못 뵙다가, 우연히 어느 암자에서 만났다. 그동안 제주도에서 반지하 방을 얻어 생활하셨다고 했다.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속세에서의 치열한 수행 덕분에 즐거운 나날이었다고.
그런 생활은 뜻밖의 계기로 끝났다. 제주도 생활이 주변에 조금씩 알려지자 스님의 사정을 배려한 몇 분이 절에서 소임을 맡지 않겠느냐고 말을 건네 왔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제 제주도와의 인연도 끝났다는 것을 직감하셨다고 했다. 그길로 즉시 짐을 싸 들고 다시 산속 선방으로 훌쩍 떠나 여전히 어떤 소임도 마다하고 오직 수행의 길을 걷고 계셨다. 내가 웃으면서 여쭈었다. “스님 연세도 꽤 되는데, 나중에 노후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스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수행하겠다고 부모 형제 버리고 떠나온 처지에, 편안한 노후 생활을 걱정하는 것은 욕심이지요. 수행이야말로 최고의 노후 보장 보험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도 노령 인구가 많아지면서 노후 생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늙음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이기에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길에 대한 공포 때문에 지금의 삶을 쌓아 두는 데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욕망에 대한 절제 없이 맑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청심소욕(淸心少欲)이라는 말처럼, 맑은 마음으로 욕심을 적게 내는 삶이 필요하다. 현재의 삶에서 하나의 원칙을 찾아 자기를 단련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노후 대책 아닐까. 노후를 걱정하기보다 욕심 없는 현실을 만드는데 매진하자는 것이다. 몸은 곤고할지 모르지만 사람답고 향기로운 삶을 누리는 것, 그런 노후를 즐기고 싶다.
김풍기 / 강원대 교수
(‘좋은생각’ 2011.5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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