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부유한 좌파’… 진보 외연 확대되나
“10명 이상의 이공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 대학이 영어수업을 강제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영어, 필요하다. 그러나 영어수업을 강제한다고 대학수준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11일에도 트위터를 통해 학생 자살 사건이 잇따라 벌어진 카이스트(KAIST)를 비판하는 말을 쏟아냈다. 카이스트 사태에서 서남표 총장의 행보 못지않게 주목을 끈 것이 서 총장의 퇴진을 촉구하는 글을 올린 조 교수였다.
각종 사회적 의제·현안에서 조 교수의 언행에 대한 주목, 소위 ‘조국 현상’은 ‘강남 좌파’의 새로운 등장을 함축하는 것으로 매김된다. “강남 좌파로 불러도 좋다”고 자임한 조 교수는 진보·개혁 성향을 가진 고소득·전문직 계층을 뜻하는 ‘강남좌파’의 아이콘이다.
오는 27일 분당을 보궐선거를 맞아 보수진영에서는 분당 지역의 중산층이 진보적 성향을 드러낼 것을 경계하는 ‘분당우파 각성론’까지 나올 정도로 강남좌파는 뚜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 강남좌파의 새로운 등장 = 강남좌파론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있었다. 당시 집권세력에 포진한 386 인사를 타깃으로 보수언론과 진영에서 규정한 용어로 등장했다. “말로는 좌파라고 하면서 행동은 우파 못지않은” 위선을 꼬집기 위해 동원된 것이 강남좌파였다. 2006년 5월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인물과사상’을 통해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이라고 정의하고, “보수언론이 노무현 정권을 공격하려는 혐의로 읽히지만 본격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남좌파에 대한 일방적 부정의 시각을 견제하면서 공론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지만, 본격 논의가 이뤄지지는 못했다.
이번에 등장한 강남좌파는 비난과 공격의 수단이 아닌 뚜렷한 실체를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중산층 이상의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위치를 지니면서 진보적 의식을 드러내는 이들이 누군가 붙이는 ‘딱지’로서가 아니라 유의미한 실체로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2008년 촛불집회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신언직 진보신당 강남구당원협의회 위원장은 “강남·서초 지역 당원들이 전체 당원 중 가장 수가 많은데 젊은층보다 40대 이상이 지배적”이라면서 “6월 민주항쟁 전후에 민주화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이들이 촛불집회를 계기로 다시 한번 광장으로 나왔으며 그 과정에서 진보신당에도 대거 합류했다”고 말했다. 그는 강남좌파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대부분 직장인들로 강남에서 일정한 생활 안정을 취한 보통의 중산층들”이라며 “사회 전체가 무한경쟁에 빠져드는 것에 문제의식이 크고 개혁적·진보적 방향에 공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강남좌파 어떻게 봐야 하나 =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우리 사회에서 강남좌파라는 말은 분명 실체가 있다”고 진단했다. 서구에서 60~70년대 좌파성향 그룹인 히피들이 나타났다가 도시전문직 젊은이들을 뜻하는 ‘여피(YUPPIE)’ 좌파가 나왔듯 우리도 민주화운동을 거친 386세대 이후 포스트 386이 출현했으며 강남좌파는 그 일부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넥타이를 매거나 하이힐을 신고 촛불집회에 나온 직장인들은 기존 운동권과는 달랐고 80년대 넥타이부대와도 달랐다”고 말했다.
중앙대 신광영 교수(사회학)는 강남좌파가 서구에서 말하는 일종의 ‘뉴클래스’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서구에선 70년대에 이미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고학력·전문직 종사자들이 사회비판적인 진보세력으로 나온다는 논의가 있었는데 우리나라도 그런 양상이 나타난 것”이라며 “70~8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40~50대가 되면서 전문적인 비판과 함께 대안제시까지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강남좌파의 성격에 대해서는 대체로 리버럴(자유주의)이거나 중도좌파에 가깝다는 분석이 많았다. 인하대 김진석 교수(철학)는 “정확히 보자면 리버럴, 중도우파나 좌파의 성격인데 우리는 이들을 진보라고 부르니까 강남좌파라는 말도 생겼다”고 말했다.
◇ 진보의 토대는 넓힐 것인가 = <진보집권플랜>을 펴낸 조국 교수는 2012년 진보·개혁세력이 힘을 합쳐서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강남좌파의 등장은 진보가 꼭 노동자·서민 계층이어야만 한다는 공식을 깨고 진보의 외연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현실에 대한 불만들을 흡수해 큰 변화의 목소리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신광영 교수는 강남좌파를 비롯해 좁은 의미로 담기 어려운 다양한 변화의 속성들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진보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조직된 노동조합의 조직률도 낮고 환경, 여성, 다문화 등 굉장히 다양한 이슈를 포괄적으로 다뤄내기도 어렵다”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서 진보적인 속성을 끄집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진보가 논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기 교수는 “강남좌파가 과포장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젊은 세대들에게 진보 이미지에 대한 호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며 “강남좌파들 대부분이 오피니언 리더 그룹들이기 때문에 여론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진석 교수 또한 “리버럴인 강남좌파와 기존 진보세력의 차이는 있겠지만 충분히 연대를 얘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정치학)는 “강남좌파는 양날의 칼이라고 본다”며 “리버럴한 세력을 넓히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진보에 대한 평가절하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다.
황경상기자 (2011.4.12. 경향신문)
'교양· 상식. 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 (0) | 2011.07.12 |
---|---|
아우라(Aura) (0) | 2011.06.29 |
정재승 교수에게서 듣는 뇌과학 Q&A (0) | 2011.04.01 |
거짓말, 투사 그리고 자아 분열 (0) | 2011.03.30 |
물 부족국가? 물 오용국가! (0) | 2011.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