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해 볼 수 없는 죽음
공자는 일찍이 “내가 많이 알아서 성인이 아니라 많은 일을 지냈다.”라고 말했다. 이는 공자만의 말이 아니다. 인생이란 이와 같이 숱한 일을 겪으면서 죽음에 이른다. 이를테면 사랑도 해보고 공부도 해보고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본다. 삶이란 경험의 과정이요 연속이다. 그러나 죽음만은 절대로 경험해 볼 수가 없다. 경험을 거부하는 세계다.
물론 우리는 남의 죽는 것을 보고 죽음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심장의 고동이 멈추고 맥박이 끊어지고 신체가 싸늘하게 경화하여 생명 없는 물체로 화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일 뿐 주체적 체험은 아니다. 죽음은 주체적 경험과 자각적 체험을 거부한다. 우리는 절대로 죽음을 앞지를 수 없다. 죽음을 한번만이라도 경험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죽음은 인간의 영원한 한계상황이다. 이것은 인류가 안고 가야할 영원한 숙제인 셈이다. 상황은 우리가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고 변혁할 수도 있다. 도시가 싫으면 시골에 내려가 살 수 있고 제도 또한 그렇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돌파할 수도 없는 절대적이고 운명적 상황이 있다. 이것이 한계 상황이다. 한계 상황은 인간의 절벽이요, 전후가 단절된 운명적 한계이다. 우리는 이성적 존재인 동시에 시간적 공간적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죽음과 마주선 인간이지만 시간과 공간적으로 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서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삶에는 항상 죽음이 따라붙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에 절대 모순이 있다.
상식적 인생관은 인간의 생명은 어머니 뱃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땅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한 번뿐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그만 이라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일생관이라 하겠다.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과 내세의 존재를 말한다. 생명은 두 번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이생관이다. 불교는 다생관을 취한다. 사람의 생명은 과거·현재·미래를 통해서 윤회를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 있기 전에도 나는 존재해 있었고 죽고 난 후에도 영원히 존재하여 자기가 짖는 행위에 따라 전생에서 금생으로 금생에서 내생으로 그칠 줄 모르는 사이클처럼 윤회 전생한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서 어떤 것을 믿고 취하고 지지하던지 죽음에 의해서 현재의 생을 끝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무엇이 옳은지는 범인의 인식능력의 범위 밖에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고 신앙의 문제로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다만, 길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세 가지 기본적 감정을 갖는다. 첫째는 공포요, 둘째는 비애요, 셋째는 허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싫어하고 죽음을 미워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관념적 무지에서 오고 비애의 감정은 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에서 온다. 허무의 감정은 자기의 존재가 결국 하잘 것 없다는 사실에 유래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인의 말씀과 그들의 행적을 본받아야 하는 절대성이 있다.
시몽 / 장성 백양사 주지
(2010.9.10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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