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의 하산 길에서

송담(松潭) 2009. 10. 16. 14:00

 

인생의 하산 길에서

 

 

소설가 김형경은 『천 개의 공감』이라는 책에서 인생의 중년에 해야 할 중대한 과제로서 목표의 수정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애 초기에 우리가 설정한 삶의 목표는 그 시기의 결핍감이 반영된 것들입니다. 그동안 삶을 추진시킨 에너지 역시 성적 욕망과 공격적 추동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은 사랑받기 위해, 결핍을 메우기 위해, 질투하고 시기하는 힘에 의해 추진되는 에너지였습니다. (....) 이제는 새롭게 형성된 정체성에 맞춰 삶의 목표를 수정하여야 합니다. 하던 일을 바꾸라는 게 아닙니다. 그 일을 계속해서 더욱 전문성을 쌓으면서 내면의 목표를 수정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사업을 해서 멋진 사옥을 짓는 게 목표였다면, 이제는 그 사업을 통해 어떻게 사회적인 책임을 완수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더 늦기 전에 변신을 시도하고 싶다. 익숙한 것들에만 머물던 시선을 조금 비끼어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우고 싶다. 사십대까지 좋아하던 음식, 취미, 음악, 이성의 타입 등은 그 이후에 거의 그대로 이어진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몸과 마음의 습관을 바꾸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기호나 취향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보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실존의 의미 충전방식을 근원적으로 리모델링하지 않으면 허욕에 치여 옹색해질 것이다. 인생의 궤도에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고지식한 채로 현실에 순응하면서 조로(早老)해 버릴 것이다. 반면에 낡은 껍질을 벗고 혁신과 도전을 감행한다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내려갈 때 / 보았네 / 올라갈 때 / 보지 못한 / 그 꽃

 

고은 선생의 「그 꽃」이라는 시다. 여기에서 꽃은 무엇을 상징할까. 성장과 출세의 오르막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좌절과 낙심의 내리막길에서 새삼 눈에 들어오는 존재의 의미는 아닐까. 그것은 원점으로 인생을 차분하게 조감하는 시공간이 지금 중년 남성들에게 절실하다. 위의 시에 대해 이문재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분들은 다 아시리라. 등산은 하산에서 완성된다. 집에 도착해 등산화 끈을 풀어야 등산은 끝난다. 산정에 올랐다가 내려오지 못하면, 그것은 등산이 아니다. 조난이다. 산을 오를 때는 꽃이 보이지 않는다. 정상이 꽃이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려는 내 의지, 내 체력이 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상에 도달하는 순간, 그 꽃은 져 버린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오르막길만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와 젊은이만 있다. 올라야 할 정상만 있다. 마흔 줄에만 들어서도 곳곳에 찬밥 신세다. 내리막길에는 안내판도 없다. 진짜 꽃은 홀로 내려오는 하산 길에 피어 있다. 그런데 난감하다. 내리막길에서 발견한 이 꽃, 이 꽃을 누구에게 바치랴.

 

지금 한국의 남성들을 짓누르는 강박은 무엇인가.

‘끗발’에 대한 야망이다. 남부럽지 않은 자리에 올라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오기 같은 것이다.

그것이 급속한 경제 성장의 에너지가 된 것도 사실이다. 이제 그 신화가 끝나고 어쩔 수 없이 내리막길에 들어선 마당에 인생관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패배와 낙심도 삶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부분으로 받아드리고, 자기와 타인의 나약함을 보듬어 안은 측은지심이 요구된다. 유능함과 무능함 사이의 좁은 거리를 확인하면서 세상에 대해 보다 겸허해져야 한다. 하산하는 길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열어야 한다.

 

 

김찬호 / ‘생애의 발견’중에서(발췌정리)

 

(위 글의 제목 ‘인생의 하산 길에서’는 독자가 임의로 정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