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이 말을 걸어올 때

송담(松潭) 2009. 10. 16. 13:59

 

죽음이 말을 걸어올 때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이 말은 중세 유럽의 수도사들이 아침 인사로 나누던 말이라고 한다. 죽음은 모든 생명체에게 가장 확실한 미래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까지도 다채로운 상상을 펼친다. 그런데 인간이 사는 모습을 보면 그 어느 동물보다도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마치 자기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인 양 착각한다. 그렇게 애써 외면하던 죽음이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을 내밀어 인생의 시한(時限)을 선언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생의 종말이 가시권에 들어올 대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허무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한국인들은 장수(長壽)를 으뜸가는 복으로 여겨 왔을 만큼 죽음을 회피하거나 싫어한다. 이런 현세지향적인 문화에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나 예술이 상대적으로 빈약해질 수 있다.

 

삶과 죽음은 항상 함께 있다. 생명체는 그 자체로 늘 죽음을 내포하고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죽음을 향해 계속 달려가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 주변에는 늘 죽은 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품이나 묘소가 그것이다. 죽음은 삶의 무의미한 해체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완성일 수도 있다.

 

죽음을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생명을 쇄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죽음을 선고 받고 삶과 세상과 타인에 대한 연민이 한결 강해질 수 있다. ‘죽음은 인생 최고의 스승으로서 살아 있는 자들을 새롭게 한다’고 퀴블러 로스 박사는 말했다. 나쓰메 소세키는 ‘죽음은 삶보다 편안하고 귀한 것’이라고 했다. ‘평온하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테레사 수녀는 말했다.

 

늙어 보니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는 고(故) 박경리 선생의 고백을 많은 노인들이 실감할 수 있을 때, 세상은 부드럽고 너그러워질 것이다. 되돌아보니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생의 막바지 길목에서 뭇 욕심들을 홀연히 떨쳐 버리는 마음자리에 깃드는 깨달음은 후손들에게도 커다란 은총이 될 것이다. 무욕(無慾)의 현자들이 보헤미안처럼 살아가면서 생의 비밀을 가꾸고 그 화원에 만인이 초대된다면, 암울한 시대에 박명(薄明)의 새벽빛으로 저마다 생명의 소실점을 비춰 볼 수 있다. 죽음에 바짝 다가서는 노인들의 발걸음, 유유자적 자유롭게 방랑하는 모습을 마음에 아로새기면서, 우리는 저마다 멋진 종말을 꿈꾸고 나날의 생활을 축복한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지.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지만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 나바호 인디안 격언 -

 

김찬호 / ‘생애의 발견’중에서(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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