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죽음으로
무엇을 잃었단 말인가?
삶과 죽음은 둘이 서로 의지하여 삶이 죽음이 되고 죽음이 삶의 조건이 되어 인간의 생애에 양극을 이루며 공존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아주 쉽게 생물학적 정의를 내려 보자.
나는 본래 이 세상에 없었던 존재였다. 각자 자기가 태어난 날짜를 헤아려 보면 생일 그 이전에 나는 이 세상에 없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 나는 죽음을 비로소 앞두게 되었다.
따라서 죽음이란 삶을 전제로 해서 존재한다는 명백한 진리가 성립된다. 나는 남녀간의 사랑이 인류의 종족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본능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과 쾌락의 생식 행위로 인해서 태어난 결과물이다. 바로 그 생식 행위의 결과 나는 하나의 존재로서 매듭이 만들어졌고, 그리고 그 매듭은 훗날 죽음이라는 커다란 환멸에 의해 풀리면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삶은 끝내 죽음을 통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위대한 생명이 한낱 죽음의 소멸로 끝나고 말다니. 참으로 허망하다. 그런 뜻으로 보면 삶은 별 의미가 없고 인간은 참으로 불쌍한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불쌍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본래 없었던 것인데 잠시 존재하다가 다시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잃는 것이 없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죽음으로 무엇을 잃었단 말인가.
고독한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나 부모 형제라도 자기 자신과의 마음의 일치를 이룰 수 없다. 이웃과는 개성과 기질이 달라서 완전한 일치는 더욱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건강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와 정신의 안정이다. 그런 중요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를 통해서 얻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직 고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보물이다. 우리는 고독해지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아주 많아야 하고 자기 자신과의 만남의 대화를 즐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부터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고독에 단련된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내면적 자아가 공허한 사람일수록 외부에서 끝없는 자극을 구한다. 그는 외부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면 스스로 파멸한다. 사교가 뛰어난 인물은 대체로 지능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일단 평가해도 된다. 그러나 비사교적인 사람들, 특히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봐도 좋을 것이다. 프랑스의 저술가 벤나단 디 상파엘은 ‘음식을 적게 먹으면 건강에 좋고, 사람을 적게 만나면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의미 깊은 말을 남겼다. 따라서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고 즐겁다면 당신은 정신의 노다지를 캔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과 만나기를 피하고 고독을 즐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독은 뛰어난 인물들에게 찾아오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충동은 본능적이지만
신비한 계시가 들어 있다
인간의 내면에는 두뇌보다 더 현명한 무엇인가가 숨어있다. 우리는 생애에서 아주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에 깊이 숨어있는 충동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충동은 일종의 본능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본래 어디서 유래된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 내면에는 일종의 신비한 계시가 깃들어 있어서 본능적인 충동을 인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쇼펜하우어 인생론에세이 ‘사랑은 없다’중에서 / 이동진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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