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오늘 죽을 수도 있다

송담(松潭) 2007. 2. 13. 21:32
 

 

우리는 오늘 죽을 수도 있다


 “여러분의 집에는 혹시 가훈이 있습니까?” 강의 시간에 저는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느 학생은 자기 집의 가훈이 “정직과 인내”라고 말하고, 이어서 다른 학생도 자기 집의 가훈을 소개해주더군요. “하면 된다!”라고요.

저는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자에서는 칸트식의 금욕주의가 느껴졌고, 후자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형의 국가주의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정직과 인내”는 좋은 가훈이지만, 무엇인가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까? 가족 성원 하나하나보다 가족이란 조직 자체를 위한 규율 같으니까요. 그러나 가훈은 가족 성원 각자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조언이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학생에게 도대체 누구에 대한 정직이고, 무엇을 위한 인내인지를 되물어 보았습니다. 학생은 대답을 못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웃음과 즐거움”이라는 가훈이 어떠냐고 그에게 제안을 해보았습니다.


 반면 “하면 된다!”라는 가훈에는 인문학적 섬세함이나 배려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가훈이 정치적이고 심지어는 전투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은 자만의 느끼는 것일까요?

만약 이 가훈에 입각해서 살아간다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의도하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기 쉬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사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강요하면, 이것은 옛날에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로 미화되던 것이지만 사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스토킹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두 번째 학생에게 차라리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자!”라는 가훈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학생들의 가훈을 어느 정도 경청한 뒤, 저는 가훈이 아직 없다고 말한 학생들에게 이런 가훈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죽을 수도 있다.” 학생들이 모두 까르르 웃더군요. 가훈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저주나 죽음의 냄새가 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정색을 하고 이 가훈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만약 이 가훈대로 여러분의 가족을 한번 만나 보세요. 그럼 여러분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오늘 음식을 맛없게 만들었다고 해봅시다. 오늘 저녁쯤 어머니가 사고로 갑자기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반찬 투정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먹는 음식이 어머니가 해주시는 마지막 음식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또 자신의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걱정하는 어머니가 있다고 해보지요. 오늘 낮에 그 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이가 등교할 때 과연 어머니는

“공부 열심히 해. 절대 졸면 안돼”라고 훈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보는 아이의 얼굴이 마지막 보는 얼굴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죽을 수도 있다”라는 교훈은 삶에 지쳐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묘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철학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악취 속에서도 꽃을 피우려면

 

 불행이도 우리의 삶이 처한 환경은 심한 악취가 풍기는 곳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악취에 너무 노출되어 있어서 우리의 후각이 이미 상당히 마비되어버렸다는 점입니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말이 떠오르는군요.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고 그 스님은 늘상 강조했거든요. 결국 우리에게는 코를 막고 달아날 곳이 달리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지금 바로 여기, 악취가 풍기는 곳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유일한 터전이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악취가 풍기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겁니다. 그것은 악취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영원히 좋은 향내만 풍기는 다른 곳을 꿈꾸기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스님들은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그네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연꽃에 비유하길 좋아하지요. 그런데 연꽃은 깨끗하고 맑은 물에서는 향내를 풍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썩어가는 시궁창 같은 물에서 피어날 때에만 그윽한 향기를 낸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보조국사 지눌이 말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만 하듯이, 악취가 풍기는 곳에서만 그윽한 향기가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낯설게 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 넘어져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이 넘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신주 / ‘철학, 삶을 만나다’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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