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과거로의 욕망, 퇴행

송담(松潭) 2010. 4. 19. 17:30

 

과거로의 욕망, 퇴행(退行, regression)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뻔한 사실 앞에서도 왜 사람들은 과거로 가고 싶어하는 걸까요? 과거를 현재처럼 살고 싶어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일까요? 누가 말했듯이, 나이가 들면 지난 시간이 그리워지는 것일까요? 프로이트는 이러한 과거로의 욕망을 퇴행(退行, regression)심리라고 하고, 이걸 병적인 증상이라고 규정합니다. 병적이라! 좀 심한 말임에 틀림없지만, 그저 허튼소리로 넘길 건 아닙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퇴행은 과거로의 자연스런 추락이 아니라 현재 밖으로의 의도적인 도피입니다.

푸코(1926~1984)는 이걸 회귀가 아니라 의지라고 달리 표현합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이 “나 돌아갈래”하면서 자살하는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이건 분명 그냥 과거의 시간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강한 의지입니다.

 

 문제는 의지는 굳은데, 그 의지를 실현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현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대체물은 오직 오지 않은 미래일 수도 있겠지만, 미래는 대체물로서 별 영양가가 없습니다. 그래서 병적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는 미래에 무엇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식의 헛된 기대를 갖는 사람보다는 과거의 분명했던 사실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래가 상상의 불안을 갖고 있다면, 과거는 기억의 안정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퇴행은 과거를 긍정함으로써 나의 현재를 방어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현재를 더 뽐내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공부 못한 동창생의 (성공하여)당당한 등장은 과거를 부정하여 현재의 자신을 인정받으려는 퇴행입니다. 공부 잘한 동창의 (실패하여)쓸쓸한 등장은 과거를 긍정함으로써 현재를 방어하려는 것입니다. 성형수술에 성공한 사람이 사진을 없애고 싶은 것도, 볼품없이 늙어버린 사람이 과거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보여주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길은 없는 것일까요? 성공의 퇴행이든 실패의 퇴행이든 병적 증상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성인의 유아적 퇴행은 깊은 병이기는 하지만, 사실 퇴행의 시간길이가 문제일 뿐 우리는 누구나 퇴행적 심리 위안을 밥 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데, 시집와서 이런 고생을 하고 산단 말야?” 이것도 퇴행입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라는 시간의 속성 때문에 우리는 퇴행합니다. 만족하기 어려운 지금이라는 욕망의 무게에 눌려 우리는 퇴행합니다. 그러나 퇴행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지난 아름다운 사랑을 만나고 싶지만, 그건 너무 이기적인 바람입니다. 그 사람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할까요? 어릴 적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너무 이기적입니다. 당신의 어릴 적이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도 아니고, 그 친구들이 당신과 다시 어릴 적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입니다.

 

김범춘 / ‘철학, 세상과 소통하기’중에서(발췌정리)

 

* 이 글 제목(퇴행)은 독자가 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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