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치유

김유정 생가에서

송담(松潭) 2010. 2. 6. 11:38

 

김유정 생가에서



 김유정(金裕貞),

 1908년에 태어나 겨우 29살의 나이인 1937년에 요절한 소설가. 1935년에 단편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에 당선되어 작가가 되었으나 작품 활동기간은 겨우 3년 남짓에 불과했고, 30여 편의 소설을 발표하고 폐결핵으로 죽었던 불행한 소설가.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평가할지  모르지만 나는 김유정을 천재라고 부른다. 문학청년 시절 나는 김유정의「봄봄」이라든가 「동백꽃」을 읽으며 전율했었다. 그의 소설은 내가 추구하는 도시적인 감수성과 도회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귿이 분류하자면 그의 소설은 ‘농촌소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은 멋을 부리는 작위성이 전혀 없었고, 천연스러운 익살과 천진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원래 김유정은 숙종의 외할아버지이자 국구(임금의 장인)였던 김우명의 후에로, 그의 집안은 명문가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춘천에서 수천 석을 하던 명가였으나 어릴 때 조실부모한 이후로 김유정의 집은 몰락했다. 지독한 말더듬이로 열등감이 심했던 김유정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배울 것이 없다고 자퇴했고, 당대의 명창 박록주의 공연을 보고 짝사랑을 시작한다. 수십 차례 연애편지를 보냈으나 끝내 거절당한 김유정은 고향에 낙향하여 방랑생활을 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김유정의 일화보다 더 내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김유정이 죽기 열흘 전에 쓴 유서와 같은 편지였다. 평생지기였던 작가 안회남에게 쓴 이 편지를 문학청년 시절 나는 습작노트 첫머리에 친필로 베껴놓고 다녔다.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펑펑 울었다. 아아, 그때가 1965~6년, 내 나이 갓 20살 때였다.


 필승아(안회남의 본명),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猛熱)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으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50일 이내로 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눈물을 글썽이며 김유정 생가를 나오자 함 군이 말하였다.

“선생님, 어디로 갈까요?”

나는 대답했다.

“오십 년 전 과거로 가자.”

“예?”

“갈 수만 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자.”

돌아오는 길에는 억수처럼 장맛비가 내렸다. 무서운 기세로 흘러내리는 장맛비를 밀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윈도우 브러시를 보면서 나는 문득 릴케의 시를 떠올렸다.

릴케는「그대 불쌍한 가난뱅이」라는 시에서 자신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 그대는 불쌍하다. 도시의 지붕위에 복되어 내리는 봄비와도 같이,

영원히 세계도 없는 독방의 죄수가 품는 그러한 소망과도 같이,

그리고 돌아눕고선 행복해지는 흡사 병자와 같이,

그대는 소녀의 뱃속에 든 태아를 숨기고 싶어서 자기 임신의 첫 순결을 질식시키도록 허리를 졸라매는 소녀처럼 불쌍하다.

그대 불쌍한 가난뱅이.

그대는 놓일 곳 없는 돌멩이......


아아, 나는 돌아가고 싶다.

갈 수만 있다면 가난이 릴케의 시처럼 위대한 장미꽃이 되는 불쌍한 가난뱅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 막다른 골목으로 돌아가서 김유정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고 싶다. 그리고 참말로 다시 일, 어, 나, 고, 싶, 다.


최인호 / ‘인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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