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치유

치유적 삶의 원리

송담(松潭) 2010. 8. 3. 15:53

 

치유적 삶의 원리

 

 

 

 40대 부인이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평소에는 얌전하지만 술에 취하면 짐승처럼 변하는 남편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진단서, 각서 등 폭행 증거가 명백한데도 남편은 “술에 문제가 있을 뿐이지, 심하게 폭행한 적이 없다.”라며 책임을 부인한다. 알코올 중독 때문에 아내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혼 사건뿐 아니라, 살인 등 많은 범죄가 술 때문에 일어난다. 재판하다 보면 사람이 아니라 술이 주범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폐해가 심각하다. 특히 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용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알코올 중독자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많다.

 

 알코올 중독은 단순히 술 취한 상태가 아니라, 심각한 질병이다. 심리적 문제와 사회적 부적응, 회피적 태도 등 다양한 원인이 있다. 중독 상태가 계속되면 신체와 정신이 황폐해져서 자신과 가족의 삶을 망가뜨린다.

 

 이 병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뛰어난 방법이 있다. AA라고 부르는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Alcoholics Anonymous)' 이 그것이다. 1935년 심한 알코올 중독자이던 윌리엄 윌슨이 자신의 치유 경험을 바탕으로 창안한 프로그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00여 개 모임에 3,000여 명이 가입했다. 이 모임에는 12단계 프로그램이 있는데, 중독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어떤 방법보다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세 가지다.

 

 출발점은 알코올 중독자가 자신의 상태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중독자 대부분은 스스로 술을 조절할 수 있으며, 과음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태도는 버려야 한다. 즉, 자신이 중독에 빠졌으며 혼자 힘으로 이를 통제할 수 없다고 인정해야 한다. 무기력한 자신과 직면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모임에서 “나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순간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는 자신보다 위대한 어떤 힘이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책임진 자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더 큰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 힘은 종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중독자는 신, 영성, 참자아 등 표현에 관계없이 어떤 위대한 것과 접촉하는 법을 배운다. 앞선 경험자들의 진실한 도움을 받으면서 차츰 초월적인 힘을 이해한다. 그 힘에 삶을 맡기고 자기 통제를 포기할수록 삶이 정돈된다는 사실을 체험하면 대부분 그 실체를 믿게 된다.

 

 마지막 단계는 이러한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돕는 것이다. 다른 알코올 중독자들이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처럼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 역시 경험자의 진솔한 과거 실패담을 들으면서 자신도 희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다른 중독자들을 돕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중독을 치유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치유적 삶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보다 큰 힘에 의지하며, 남을 진심으로 돕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술뿐 아니라 일, 도박, 불안감, 열등감 등 삶의 여러 가지에 중독되거나 취약한 점을 갖고 있다. 치유적 삶의 원리는 이러한 어두움과의 싸움에 적용할 수 있다. 치유란 자신에게서 불완전함과 나약함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끌어안는 것이다. 치유의 힘은 완전함이 아니라 중독에 빠질 정도의 깊은 상처와 실패를 통해 오는 것이다. 우리를 불구로 만드는 것은 결점과 나약함이 아니라, 이를 감추고 회피하는 태도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치유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치유가 시작된다.

 

 

윤재윤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좋은생각 2010년 8월호)

'상처의 치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  (0) 2011.01.27
바람과 태양을 마셔봐  (0) 2010.11.16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0) 2010.03.23
김유정 생가에서   (0) 2010.02.06
슬픔, 통곡하기  (0) 2010.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