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삶을 망각하다! - 권태 아니면 변태
지독한 이분법, 불멸에 대한 판타지, 학습의 부재 등 사랑과 성을 둘러싼 오만과 편견은 실로 깊고도 넓다. 헌데,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오만과 편견이 하나 있다. 연애는 둘만의 관계이고 다른 삶과는 분리되어 있다는, 다시 말해 사랑과 삶을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단 관계가 형성되면 일이고 공부고 다 집어치우고 오직 연애를 향해 돌진한다. 한마디로 연애가 삶을 집어삼켜 버리는 형국이다.
사랑이 둘 사이의 아주 특별한 관계인 건 맞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소멸된다. 특별한 시공간적 조건이 없으면 사랑은 태어날 수도, 이루어질 수도 없다. 그 시공간적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일상의 배치다. 그리고 그 일상은 수많은 관계들로 직조되어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만약 지금 사랑하는 연인과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무인도로 가서 영원히 살라고 한다면? 아마 누구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헤어지면 헤어졌지, 설령 들어간다손 쳐도 장담컨대, 둘의 사랑은 순식간에 붕괴될 것이다. 홀로 빛나는 별이 없듯이, 배경이 없으면 어떤 존재도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맹목적일수록, 다른 관계와 단절될수록 강렬하다는 믿음이 여전하다. 상대방에게 그런 식의 집중을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예컨대 연애가 시작되면, 어떤 여성들은 친구관계를 다 끊어 버린다. 당연히 사회적 관계나 활동도 사라져 버린다. 오직 남자친구만 바라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하기사, 요즘 남성들도 비슷한 경향이 있다. 하루종일 문자메세지를 통해 애인의 모든 동선을 체크하고 자신의 일과를 보고하는데 골몰한다. 그러다 연애가 깨지면 완전 패닉에 빠진다. 깊이, 순수하게 사랑을 해서라기보다 일상의 토대가 졸지에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가정해 보자. 만약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지 않고 계속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또 멜로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죽지 않고 무사히 결혼에 골인했다면? 그들 앞에 놓인 건 둘 중 하나다. 먼저, 권태로운 일상. 둘만을 바라보는 사랑은 필연적으로 권태와 마주한다. 초기의 격정이 잦아들면 그때부터 서서히 생활 쪽으로 시선이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일상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결국 둘의 관계는 권태로운 반복 속으로 빠져든다. 권태는 고독을 낳고 고독은 우울증을 낳고 우울증은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다.
다른 하나는 변태적 쾌락, 성욕에 탐닉하는 것이다. 연인들에게 일정 기간은 성욕이 가져다주는 쾌락 때문에 관계가 돈독해지기도 한다. 헌데, 이것도 계속 유지되려면 더더욱 쾌락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멈추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성욕이 죽음으로? 「감각의 천국」이라는 영화가 그에 대한 좋은 교과서다.
영화는 두 주인공, 사다와 기치가 성행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처음엔 여급인 사다가 주인인 기치에게 예속되었다가 차츰 둘의 관계가 전도되기 시작한다. 사다가 원하는 것, 거기에 맞춰 기치의 신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부터 기치의 신체는 오직 남근으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길을 걸을 때에도, 화장실에 갈 때에도, 깨어 있거나 잠들거나 사다는 기치의 ‘그것’을 놓지 않는다. 사랑이 성욕으로, 성욕이 다시 남근에 대한 욕망으로 전이한 것이다. 남근에 대한 이 맹목적 집착에는 원인도, 목적도 없다. 그리고 그때부터 욕망은 죽음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죽음이야말로 성적 쾌락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다는 기치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치도 죽음을 수락한다. 아니, 기치에겐 이미 생에 대한 어떤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욕망은 완벽하게 사다에게 회수당했기 때문이다.
종류와 유형이 다를지언정 변태성욕은 필연적으로 이런 궤적을 밟을 수밖에 없다. 사디즘 아니면 마조히즘의 여정!
남녀간의 사랑만 그런 게 아니다. 특히 요즘은 부모자식 간의 사랑도 심각한 수준이다. 아들을 스토킹하는 엄마, 하루종일 딸의 동선만 챙기는 엄마 등등. 어떤 점에선 이성애보다 더 심각한 블랙홀이 되기도 한다. 이성에는 헤어질 수나 있지 부모자식 간은 평생 이별도 불가능한 게 아닌가.
넘치거나 모자라는 건 다 나쁘다. 특히 넘치는 것이 더 좋지 않다. 상대가 감당해야할 몫까지 일일이 챙기는 건 사랑이 아니라 지배욕이다. 그런 점에서 부모들의 이런 과잉서비스도 일종의 변태다. 무엇보다 사랑의 이름으로 자식의 삶을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체 왜 이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삶이라는 배경을 망각한 채 오로지 서로한테만 몰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자식이 어느 정도 자라 이 관계에 틈이 생기게 되면 앞에서 말한 연인들과 동일한 수순을 밟는다.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해지면서 무기력한 권태에 빠지거나 아니면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더더욱 그 관계에 집착하거나, 전자는 흔히 중년우울증으로, 후자는 주로 시어머니-며느리 아니면 장모-사위 간의 갈등으로 표현되곤 한다.
결국 남녀 사이뿐 아니라 우리시대 모든 사랑의 여정에는 두 개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권태 아니면 변태라고 하는. 이것이 사랑이라는 활동의 장에서 삶을 지워 버린 데 대한 가혹한 대가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고미숙 / ‘호모 에로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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