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의 가을
H는 요즘 들어 남편이 가을을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 시작은 ‘한숨’이었다. 보통 정신없이 한 술 떠 넣고 나가기 바쁜 아침시간에 남편은 아주 조용히, 은밀하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콩나물국이 지겨워서 한숨을 쉬나 싶었던 H는 남편이 콩나물국을 한 그릇 다 비우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진상을 파악했다. 결혼한 지도 벌써 7년차. 7년 동안 한시도 떨어져 본 적 없이 붙어 살아온 덕분에 이제 남편에 관한 한 웬만한 것은 전부 다 알아차린 그녀였다. 그 한숨은 콩나물국과는 별개였고, H는 그것이 남편이 가을을 타기 시작한 전형적인 신호라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한숨 다음의 증상은 귀가시간이 조금씩 늦어지는 것이었다. 일이 끝난 뒤에도 바로 퇴근하지 않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술이 곤드레만드레 되어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회식 없이는 8시를 넘지 않던 사람이 10시 정도에 아주 약간 취한 상태로 초인종을 누르는 날이 많아졌다. H는 남편이 어떤 방식으로 2시간의 시간을 보내는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 분명 회사 근처 포장 마차에 앉아 들이치는 가을바람을 맞아가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나 따라다니던 예쁜 후배는 누구에게 시집가서 잘 살고 있을까?’ 따위의 옛추억이나 떠올리며 말이다. 그 자리에 동행하는 사람은 주로 입사 동기나 자주 만나는 동창들일 것이고.
내년이면 마흔 줄에 들어서는 탓인지 이년 전부터 H의 남편은 유난히 가을을 탔고, H는 그런 남편이 안쓰러워 방황을 그저 묵인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서재 방을 청소하다 남편이 이번 가을엔 유난히 쓸쓸해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고민거리라도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특히 간밤에는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H는 인터넷 화면 창에서 ‘열어본 페이지 목록’을 열어봤다. 남편이 주로 머문 곳은 3, 40대가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호회 홈페이지였다. 남편의 아이디를 발견한 H는 주저할 것 없이 남편이 올린 글을 클릭했다.
‘가을 바람에 낙엽이 뒹구는군요.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잘 살고 있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마음도 따라 울적해 지는군요. 행복한 감정이 언제였는지 아득한 기분도 들고요.’
별 내용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가을 타는 남자의 상념이 별 맥락 없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이런 감상적인 감정을 글로 적은 것이 우습기도 하고 안됐기도 한 H는 남편이 돌아오면 좀 더 잘해줘야겠다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독백과 상념이 남발된 그 글의 끄트머리에서 H는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글의 말미에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외로운 독신남이 가을의 외로움을 덜어낼 좋은 친구를 찾습니다. 쪽지 주십시오.’
“외로운 독신남?” H의 입에서 바로 욕이 튀어나왔다.
나이 들어가는 남자의 방황? 좋다 이거다. 하지만 적어도 기준이 있고 생각이 있는 방황인 줄 알았더니 이런 수작이나 부리고 있었다니. 어떻게 눈 먼 여자를 꾀어서 바람이나 피우는 게 존재론적 고독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인가. H는 주저하지 않고 남편에게 쪽지를 보냈다. 쪽지에는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적었다.
“조심해. 죽는 수가 있어.”
박소현 / 연애컬럼니스트
(2008.10.17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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