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또 다른 행성으로의 모험
빅토르 위고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한 사람으로 축소되고, 그 사람이 곧 신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근대사회에 들어와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신의 자리에 많은 것들이 들어섰다. 이성, 과학, 국가, 예술, 혁명, 스포츠.... 그리고 그 반열에 연애도 들어섰다. 사랑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신령한 힘이다. 연애는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맨 정신이라면 어떻게 오로지 한 사람에게 그렇게 홀딱 빠져들 수 있겠는가. 연애 감정은 일종의 중독 또는 착란 증세이고,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광기’라고 할 수 있다. 선한 광기.
미시간대 로버트 프라이어 교수는 “사랑에 빠졌을 때 분비되는 세로토닌 등은 상대의 결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해 사람을 눈멀게 만든다”며 “이 때가 되면 뇌에서 화학물질이 마구 쏟아져 나오므로 주변에서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연애의 매혹은 무엇일까? 나는 그에게 그리고 그는 나에게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온전히 헌신하면서 절대자의 위치에 마주 서고 싶어 한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욕구는 오로지 그와의 배타적 관계 속에서만 채워야 한다. 상대방이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치켜세워 줄 때 살아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와 하나가 되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곧 영원한 현재다. 그 어느 누구도 이 둘만의 오롯한 우주에 침입하지 못한다.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사랑이 시작될 때라고 세익스피어가 말했던가. 그때 세상은 전혀 다르게 체감된다. 연애는 잃었던 시력을 되찾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만물이 신선하게 다가오고 스쳐가는 바람 한 자락도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사랑을 잃을 때 그 환희는 한순간 비탄으로 바뀐다. 황홀하게 펼쳐지던 천국이 닫히고 암울한 지옥문이 열린다. 세상의 꼭대기에 올라섰다가 바닥없는 절망과 모멸감의 심연으로 추락한다.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한 포만감은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돌변한다. 그 뜨거움과 차가움의 체험은 인생의 나이테에 흔적을 남긴다.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눈처럼 쌓였던 사랑이 녹아 세월의 빗물로 흘러내릴 때 그 바닥엔 어떤 침전물이 쌓이는가.
사랑 또한 언제나 순탄치 않다. 황홀은 짧고 번민은 길다. 처음 사랑이 시작될 때는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하고 감사했다. 빈 마음으로 존재 그 자체를 누린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욕심이 생긴다. 상대방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많아지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짜증과 분규가 생긴다. 왜 너는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만큼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느냐고 닦달한다. 존재의 향연이 막을 내리고 소유의 실랑이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한 집착 속에서 관계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한편, 이 세상의 어디든 쫓아가 함께하리라던 다짐, 무슨 일이 있어도 변치 말자던 언약이 무색해진다. 왜 그렇게 될까? 어쩌면 상대방을 사랑했다기보다는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기의 감정에 도취되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고난과 함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전혀 다른 행성에서 온 타자를 향해 뻗어 나가는 영혼의 운동이다. 그와 동거할 또 다른 행성을 건설하는 모험이다. 각자의 삶을 가치 있게 향상시키면서 더불어 성장해야 하는 과제가 거기에 주어진다. 상대방에 대한 순전한 관심으로 자기를 초월하는 역설, 자기를 한없이 비워내면서 그의 여백을 빚어내는 신비가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하고,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숭고한 미덕을 조명한다. 그 반짝임으로 험한 세상을 견디면서, 삶의 한구석 텃밭에 씨앗 하나 심어 새로운 존재를 잉태하고 싶다. 그 발아를 기다리는 심경은 다른 행성까지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지만, 사랑의 능력을 믿으며 하루하루 나아간다.
김찬호 / ‘생애의 발견’중에서(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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