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몽상 사이
이름 박인철. 중3 때부터 연애질을 시작해서 20대 후반인 현재까지 무려 8번의 연애경험을 갖고 있다. 대개 겨울에 시작해서 여름에 헤어지는 사이클을 밟았다고 한다. 결별의 이유는 극히 간단했다. 처음 필이 꽂히고 나면 거의 매일같이 만나서 사랑을 확인한다.(동거를 한 경험도 있다) 그러다 세 달 정도 지나면 점차 열기가 가라앉기 시작한다. 호기심도, 감흥도 약화되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그 상태가 아주 편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친들은 그 상황을 그렇게 받아드리질 않았다. 사랑이 식었다고,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간주한 것이다. 처음 뜨거웠던 그 상태만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감정적 간극이 벌어지게 되면 자주 투닥거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결별의 상황에 이르고, 그러면 또다시 새로운 짝을 찾아 헤맨다. 최근에 헤어진 여자친구는 자신과 헤어진 지 1주일 만에 다른 남친이 생겼다고 한다. 사실 이런 경우는 사랑을 한다기보다는 혼자 있는 걸 못 견딘다고 해야 맞다. 일종의 중독증인 셈이다.
이 예가 말해 주듯, 대개의 경우, 사랑의 영원성이란 보통 초기의 격정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멜로물의 구조는 대개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확인하기까지의 스릴과 서스펜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음엔? 드라마가 끝난다. 말하자면, 서로를 열렬하게 갈망하는 순간만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사랑이라는, 사랑의 진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허나, 만약 이 초기의 격정이 2년, 3년 계속된다면? 아마 과도한 정력 소모로 수명이 반으로 줄고 말 것이다. 아님 불치병에 걸리거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은, 곰곰이 따져 보면, 사랑은 늘 처음의 그 격정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변한 것, 아니 변절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런 망상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사랑이란 추억 아니면 몽상으로만 존재한다. 추억은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고, 몽상은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다. 사랑에 관한 각종 뒷담화들을 가만히 들어 보면, 신기하게도 ‘추억 만들기’가 주 내용을 이룬다. 풍광 좋은 곳을 찾아가는 것도, 이벤트를 즐기는 것도, 찐한 키스신을 연출하는 것도 다 추억을 위해서다. 첫사랑을 언제 경험했는가. 첫키스를 언제 했는가. 언제, 어디서 사랑고백을 받았는가 등등. 요컨대 카메라 셔터를 누르듯 그 순간을 찰칵 찍어서 영원히 기억 속에 가두고자 하는 것이다. 멜로물에 툭하면 회상신들이 나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격정이 잦아든 일상적 관계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왜? ‘추억거리’가 안되니까. 그래서 또 다시 그런 낭만이 도래하기를 고대함으로써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 추억을 토대로 다시 몽상에 돌입하는 것. 첫사랑에 대한 터무니없는 집착도 같은 맥락에 있다. 솔직히 아무도 첫사랑을 그렇게 절실하게 품지 않는다. 그런데도 첫사랑의 판타지는 지겹게도 되풀이 된다. 그게 바로 추억이라는 망상 때문이다. 말로는 아름답다. 순수하다. 아직도 그리워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뿐이다. 막상 만날 기회가 오면 거의 대부분 달아나 버린다. 왜? 아름다운 추억이 망가질까봐. 참 신기한 구조가 아닌가. 지금 현재를 과거로 만들기 위해, 과거 속에 구겨 넣고 되새김질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다니. 그 과거는 현재를 지우고 마침내 미래까지 지배해 버린다. 몽상이란 그 추억을 다시 되풀이하기 위한 미래적 투사에 다름아니다. 결국 추억과 몽상 사이를 오가느라 현재를 망각해 버린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한다. 단 한순간도 ‘지금, 여기’의 사랑을 누리지 못한다.
고미숙 / ‘호모 에로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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