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니체, 히틀러를 위한 철학자?

송담(松潭) 2014. 2. 14. 18:13

 

니체, 히틀러를 위한 철학자?

 

 

허무주의 그리고 신의 죽음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한 세기 전만해도 왕의 식탁에나 오를 법한 각종 농수산물들을 우리는 일상의 음식으로 먹고 있다. 한겨울에 따뜻한 물로 매일 목욕할 수 있다는 사실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아가 앞으로 문명이 더 발전하게 되면 사람들은 더욱 행복해질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잘사는 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다. 선진 문명의 혜택을 많이 받을수록 꿈이 없는 삶을 사는 경우도 많다. 우리 사회만 해도 그렇다. 끼니 걱정하며 살았던 1960, 1970년대의 대학생들은 그래도 ‘정의 사회 건설’이란 큰 포부와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지금, 젊은이들의 책상위에는 취업을 위한 영어 교재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여가 시간에도 컴퓨터 게임과 만화 보기 등으로 소일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작아진다. 영웅은 사라지고 작은 이익을 다투는 소시민들만이 남을 뿐이다. 거기다가 원대한 꿈과 이상은 스러져 가고 문화는 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타락하고 있다. 그런데도 삶은 더욱 권태로워지고 있다. 경제는 발전하고 문명은 진보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아질수록 더 불행해진다는 이 괴상한 문명의 역설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여기에 대해 니체(1844~1900)는 명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 그는, 현대문명은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고 잘라 말한다. 삶의 의미와 목표를 잃고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 원인은, 인간은 아직도 이미 수명이 다한 낡은 가치관에 목을 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외친다. “신은 죽었다.”라고. 그리고 초인(超人) 중심의 새로운 도덕이 필요하다고.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인간 사회는 “가축 떼가 되어 버렸다!”

 

니체가 살았던 19세기는 발전과 혼란이 함께하던 시기로, 한편에서는 자본주의가 맹렬한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산업은 날로 번창했고, 돈의 위력은 하루가 다르게 사회 곳곳을 지배해 갔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 발전에서 소외된 자들이 힘을 모았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착취당하려고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노동하는 다수가 주인으로 대접 받는 사회, 그것이 진정 제대로 된 세상일 터였다. 이러한 주장은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으로 명확해졌다. ‘사회주의’는 바로 노동자들의 생각이 담긴 이념이었던 것이다.

 

니체의 조국 독일은 그 당시에 가장 부흥한 국가였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지도 아래, 약골 국가였던 독일은 어느덧 유럽의 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층이 동시에 성장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두 계층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니체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쪽을 모두 비판했다.

 

자유주의는 사람들 개개인의 욕망을 그 자체로 자유를 인정한다. 그러자 우월과 열등의 구분은 사라져 버렸다. 뛰어난 사람의 욕구와 저열한 자의 욕망을 똑같이 가치 인정하는 탓이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의 가장 큰 가치는 평등이다. 모두가 평등하다면, 사회를 발전시킬 새롭고도 뛰어난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도 다수와 똑같이 대접 받을 뿐이다.

 

그 결과, 인간 사회는 “가축 떼같이 되어 버렸다.” 사회 전체가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나머지”, 새로운 이상과 가치에 도전하기 보다는 고만고만해져 버린 사람들 사이의 사소한 잇속 다툼 속에 매몰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인류에게는 일상의 생존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밖에 남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인류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허무뿐이었다.

 

 

노예의 도덕과 주인의 도덕

 

그렇다면 문명은 왜 이렇게 타락하고 말았을까? 니체는 그 원인을 인류가 이미 수명이 다한 낡은 가치관에 여전히 목매달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그는 겸손, 순종, 친절, 동정 등 우리가 품고 있는 ‘선함’의 기준이 실은 ‘노예의 도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예는 항상 주인에게 겸손하고 순종해야 하며, 친절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주인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주인의 도덕’은 그의 고결한 정신에 따라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은 밝고 당당하며 거침없고 냉혹하다.(옛날의 귀족들을 떠올려 보라.) 주인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주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도 지금은 ‘노예의 도덕’을 따르고 있다. 아무리 영리하고 강하다 할지라도, 노예처럼 자신의 힘을 감추고 겸손해하지 않는 인간은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도덕은 강자를 약자처럼 만들어 버렸다. 겸손, 순종 등의 약한 자의 품성과 덕목이, 강한 자의 도덕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이렇듯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 버린 주범은 바로 기독교다. 기독교는 불구자, 악한, 부끄러운 병을 앓는 자, 구제할 길이 없는 범죄자들을 모두 주인과 같은 인간으로 보고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열등한 인간의 기준에 인류전체를 맞추어 버렸다. 그래서 니체는 외친다. “신은 죽었다.”라고. 기독교가 인류의 저열한 자들의 기준에 맞추어 타락시키고 있다면, 이제 그런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인류에게 중요한 과제는 모든 사람을 배려하고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뛰어나고 강한 사람을 길러 내는 데 있다. “인류의 도덕은 가장 뛰어난 자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

 

지금의 예를 들어 풀이해 보자면, 이 말의 뜻은 간단하다.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아이디어도 많은 직원이 있다고 치자. 그가 아무리 뛰어난 식견을 펼쳐 보인다 해도, 주변에 무능하고 평범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이는 발현되지 못하고 묵살당하기 쉽니다. 오히려 위계질서를 모르는 사람, 되바라진 사람 등으로 매도당하고, 침묵하며 조직의 질서를 지키라고 강요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니체에 따르면, 이처럼 현대 문명은 다수가 문명을 이끌어 갈 뛰어난 소수를 약자라는 이유로 억누르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

 

 

사상가 니체, 행동가 히틀러

 

나아가 니체는, ‘최후의 인간’과 ‘초인’을 대비시킨다. ‘최후의 인간’은 쾌락과 만족에 빠진 나머지 모든 창조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생각 없이 일하고, 시간 나면 텔레비전 등으로 소일하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이런 ‘최후의 인간’에 해당될 듯싶다.

 

반면, 지성과 긍지로 가득 찬 ‘초인’은 넘치는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며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사람이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하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 그는 소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위대함을 갈망한다. ‘주인의 도덕’을 따르는 그는, 낡은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삶의 기준을 세우며 인류를 이끌어 나간다.

 

불행이도 니체의 이러한 생각은 뒤에 히틀러(1889~1945)에 의해 완벽하게 왜곡되고 말았다. 1889년, 45세의 나이에 완전히 미쳐 버리고 만 니체는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니체는 그를 숭배했던 여동생 엘리자베스에 의해 ‘니체 신화’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먼저 엘리자베스는 흩어져 있던 그의 저술들을 모아서 ‘니체 문서 보관서’를 열었다. 때에 따라서는 미친 니체에게 흰 사제복을 입혀 보관서 한쪽에 전시해 놓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지독한 유대인 혐오주의자였던 그녀는 니체의 메모를 모아 자기 입맛대로 편집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심지어 히틀러에게 “니체가 말한 ‘초인’은 바로 당신을 염두해 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니체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일선의 독일 병사들에게 보낸 것도 이 무렵이다.

 

사실, 니체의 사상은 나치의 행동을 정당화해 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치는 유대인이나 슬라브인들을 ‘하위인간’으로 분류하고, 우월한 아리안 족, 곧 독일 민족이 ‘지배민족’으로서 그들을 지배하며 문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분명 우월한 초인이 열등한 다수를 이끄는 것이 제대로 된 문명이라는 니체의 생각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사상가 니체, 행동가 히틀러’라는 도식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망치를 들고 철학을 하다

 

그러나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히이데거(1889~1976)가 1961년에 <니체>를 출간한 이후, 니체는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나치 철학자’라는 누명도 이제는 거의 다 벗겨진 상태다. 그것은 동생 엘리자베스가 해석한 니체였지, 결코 그 자신의 사상은 아니었다. 니체는 사실 나치가 내세우는 어설픈 민족주의나 유대인 혐오 사상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가 내세운 ‘초인’은 결코 인종적이거나 태생적으로 구분되는 특성이 아니다.

 

니체는 ‘정신적 귀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다수의 욕구를 맹목적으로 좇는다면 인류는 발전할 수 없다. 그는 창조적인 뛰어난 소수가 ‘망치를 들고 철학을 하는 것처럼’ 낡은 관습을 부수고 새롭게 인류를 진화시켜야 한다는 의지를 가졌던 것이다.

 

현대는 영웅이 사라진 소시민의 시대다. 또한 정의나 자유 같은 거창한 이념보다는 소소한 이익과 쾌락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다. 현대인의 시야가 이렇게 점점 ‘자기만의 문제’로만 좁혀져 가고 있는 답답한 현실에서, 니체의 외침은 더욱 크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안광복 / ‘철학, 역사를 만나다’중에서

 

 

* 읽으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도 타이핑 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대충 읽으셨다면 다시 읽으십시요.

  <수신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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