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존재와 시간>은 독일이 낳은 철학계의 카리스마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의 명작이다. <존재와 시간>은 이천 수백 년에 걸친 철학의 역사를 크게 바꿨다고 평가 받는다. 하이데거 이전의 철학자들은 언제나 “사물이란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등을 생각해 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철학자는 그에 대한 답으로 “사물이란 00 이다” “인간이란 00 이다”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것은 00 이다”에서 '이다'가 아닌 '00가 있다'라고 하고 그것은 어떤 것일까를 의문했다. '이다'가 아닌 '있다'에 대한 의문이었다. 말하자면 “도대체 인간이나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란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뿐이고 그런 인간을 하이데거는“현존재”라고 이름 붙였다.
존재란 어떤 것인가?
“존재”란 어떤 것인가? 하이데거가 이런 의문을 던지기 이전에 사람들은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존재”를 불꽃놀이에 놓고 파악하여 보자.
하이데거 이전의 방법이라면 그 “불꽃놀이”라고 하는 존재는 “유황, 탄소가루가 배합된 물질의 약 0.1그램을 빨강, 초록, 노란색 등으로 물들인 얇은 종이에 합쳐 불을 붙이면 불꽃이 떨어지는 완구이다”라고 설명했다.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측면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존재”란 전혀 달랐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존재라는 것은 기분으로 이해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러면 한 시뮬레이션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 보자. 물론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란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이다. 가령 자신이 20살의 여대생이라고 하자. 몇 개월 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남자 친구가 있는데, 그와 1박2일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물론 그 남자 친구는 당신에게 있어 첫 남자 친구이다. 즐겁게 놀았고, 밤이 되었다. 조용한 밤의 강가에서 문득 그가 이렇게 말했다. “불꽃놀이 할까?”
그는 당신 몰래 불꽃놀이를 준비한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이 당신을 기쁘게 했다. 둘이서 강가에 웅크리고 앉아 드디어 불꽃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바람으로 고생했지만 마침내 심지에 불이 붙었다. 불안하게 주변을 비추는 불꽃놀이의 불이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다. 그때 당신은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밤의 이 불꽃놀이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만약 이런 경우라면 지금 당신 앞에 떨어지는 불꽃은 특별한 불꽃인 것이다. 그리고 이 불꽃놀이에 대한 추억은 당신만의 것이며, 누구나 가지고 있는 추억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이해이다. 즉, 처음 남자 친구와 함께 한 첫 불꽃놀이는 다시 말해 당신만의 불꽃놀이는 다른 사람이 보기엔 보통의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객관적 존재). 하지만 당신의 이 불꽃놀이에 대한 생각 즉, 기분(정황성)은 누구에게나 같은 것이 아닌 바로 당신에게 있어서 특별한 불꽃놀이이다. 그래서 당신의 불꽃놀이의 존재는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이다.
하이데거가 이끌어 낸 “존재”란 어떤 것인가란 답을,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지 않은가? 사실 노래 중에 이런 하이데거의 사상을 가사로 읊고 있는 것이 많다. 심신이 부른 “오직 하나뿐인 그대”라는 노래도 사실 이런 하이데거의 사상 세계이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이데거의 사상을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란 것은 바로 “당신만의 특별한 only one"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생각은 이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 존재에 새로운 키워드인 “시간”을 만나게 한 것이다.
죽음을 바라보며 살다
하이데거의 사상을 해독하기 위한 또 하나의 키워드는 “시간에 사는 현존재(인간)가 그곳보다 먼저 이미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궁극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궁극의 가능성”이란 자신의 죽음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은 확실히 찾아온다. 죽음의 확실성에는 그것이 ‘언제’찾아오는가의 불확실성을 수반하고 있다”고 하면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란 것을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것에 의해 “존재”를 잃어버린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잊기 위해 인간은 매일 쓸데없는 수다 등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그 불안을 어물어물 넘기고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죽음에서 눈을 피하는 인간을 비판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인가? 불의 덩어리로부터 불꽃이 떨어지는 불꽃놀이는 머지않아, 그것도 픽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말 것이다. 뭔가 씁쓸한 순간이다. 하지만 그 씁쓸함도 불꽃놀이의 매력이다. 이 씁쓸함을 모르고 불꽃놀이의 전부를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여야 처음으로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의 한순간 한순간이 더욱 선명하고 생생해지게 된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죽음에 대해 자유로운 것만이 현존재(인간)에 단적인 목적을 부여한다”고 말이다. 즉, 자신의 죽음을 똑똑히 바라보고 산다면 매일 매일 소중해지고 자신의 존재를 빛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윤은숙 / ‘비유와 상징으로 풀어보는 철학 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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