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 1883~1924)의
<변신>
직물회사 외판원인 주인공 그레고르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한 마리 흉측한 곤충으로 변합니다. 갑옷처럼 딱딱한 등과 아치형으로 부풀어 오른 갈색의 배, 그리고 불안스럽게 꿈틀거리고 있는 수많은 다리를 가진, 아마도 거대한 바퀴벌레쯤 되는 곤충으로 변신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를 발견한 가족들은 놀라고 슬퍼하며, 한편으로는 절망하게 되지요. 그것은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사랑해서뿐만 아니라, 5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파산한 이후 그가 가족의 생계는 물론이고 빚까지도 떠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처음에는 감동적인 가족애를 발휘하여 그 흉측한 곤충을 참아내고, 돌보며, 안락하게 해주고, 그의 인간적인 것을 다시 불러내려고 노력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슬픔과 사랑은 사라지고 귀찮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저것 때문에’ 못살겠으니 ‘없앨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외치기에 이릅니다.
이유인즉 그레고르가 더 이상 돈을 벌어 생계를 책임지던 예전의 든든한 아들이자 오빠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그이 ‘어떠어떠함’이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그러다 그들의 사랑도 따라 변한 거지요. 그를 그렇게 좋아하고 돌보던 누이동생마저 “없어져야 해요. 아버지,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라는 생각은 집어치우세요.”라고 외칩니다.
변신으로 인하여 그레고르는 가족을 먹여 살리던 부양자에서 오히려 가족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착취자, 벌레로 표현되는 원형적인 기생자(寄生者)로 탈바꿈했습니다. 거대한 벌레라는 모습 자체가 기생생활에 대한 상징이며 과시인 거지요. 그러자 가족에게마저 “옆방의 물건은 치워야 한다.”라는 식의 냉대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냉대와 폭력, 증오 속에서 고독하게 죽습니다. 그에게는 가정이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레고르는 새벽 3시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 감동과 애정을 간직한 채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며 숨을 거둡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무서운 진실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가족간의 사랑조차 경제적인 토대를 두고 있다는 카프카의 통찰입니다. 그래서 설사 가족이라고 해도 경제적 관계, 곧 ‘어떠어떠함’이 변했을 경우 그에 대한 사랑도 변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이것은 인간소외의 문제이고 이러한 현대인의 인간소외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레고르의 가족들의 태도가 돌변하는 것, 어린 자식이나 늙은 부모를 내다 버리는 것도 알고 보면 모든 가치를 오직 하나의 가치, 곧 경제적 가치로 바꾸어 계산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가 깔려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가족간에 그럴 수 있을까, 아마 소설이니까 그렇겠지’라고 생각되는 그레고르의 가족들의 비인간성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는 겁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리고 누이동생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가족관계로부터도 그 감동적인 감상의 포장을 벗겨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금전관계로 되돌려버렸다.”는 거지요. 아내가 남편을 ,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어린 자식의 손을 길거리 한복판에서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며, 자식이 늙은 부모를 관광지에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풀어놓은 악령(惡靈)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물론, 악령이란 본래 그것을 받아드리는 개체 안에서만 살아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어찌 모든 탓이 자본주의에만 있겠습니까! 하지만 마르크스가 예언한 이 악령이 지금 우리 사회를 떠돌며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흉측한 곤충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이 되고 싶다면 마르셀의 철학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마르셀은 모든 인간다움은 가정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그 자체가 ‘존재의 화신’이자 ‘하나의 신비’이고 ‘존재의 힘’이며 ‘긍지의 산실’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같은 관점에서 가족이란 ‘나의 존재적 확장’이라고도 하지요. 이 말은 나의 존재가 가족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때문에 마치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내 가족에게 고통과 불행이 닥치면 내가 고통스럽고 불행해지며, 나의 기쁨과 행운이 내 가족의 기쁨과 행운이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가족관계가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길이 시작된다고 마르셀은 말합니다.
그리고 마르셀은 이러한 관계를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는 사회를 ‘가족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상대를 그의 ‘어떠어떠함’으로 판단하지 않고 오직 ‘있음’ 자체를 존중하며, 상대의 고통과 불행을 나의 고통과 불행으로 인식하는 것이 모든 윤리의 바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김용규/‘철학카페서 문학읽기’중에서 발췌정리
위 글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고 가족관계에 대한 새로운 신념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다시 한 번 위 글을 되새기며.......
행여, 우리들의 가족 구성원 중에
‘벌레’로 취급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그에 대한 생각을
바꿀 때입니다.
외면과 질시를 받으며 살아온 그 ‘벌레’같은 인간도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일진데
우리는 어찌 그를 ‘소외’로만 방치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를 방치한 이유 또한
카를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악령 때문이라니.
실로 적나라한 지적이 아닌가요.
그 ‘벌레’로 인하여 자신(처자식)이 경제적 손실이나
타격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족 중 ‘벌레’같은 존재가 있더라도
우리는 그를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확장된 나’의 모습으로,
그리고 '사랑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군요.
나아가. 세상의 소외된 많은 이웃들까지도
그런 눈으로, 그런 가슴으로 보듬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에의 길’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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