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누가 매춘부에게 돌을 던지랴

송담(松潭) 2007. 4. 27. 03:41
 

 

누가 매춘부에게 돌을 던지랴

 


필리핀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83)의 장편소설 <에르미따>가 번역 출간되었다.

시오닐 호세는 영어로 활동하는 작가 겸 언론인, 출판인이다. 5부작 대하소설 <로살레스 이야기>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미국의 랜덤하우스 출판사를 필두로 스페인과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등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에르미따> 한국어판에 붙인 서문에서 그는 “언어의 폭죽이 오늘날 아주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면서, 그러나 “(작가란)언제나 자기 민족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25일 방한한 작가는 기자들과 만나서도 “작가란 최대한 자유롭게 써야 하지만, 자신이 놓인 콘텍스트(환경)를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에르미따>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대표적 환락가인 에르미타를 배경으로 활동한 ‘전설적 창녀’ 에르미타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이다. 시간상으로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에 걸쳐 있다. 프롤로그에 이은 소설의 첫 부분은 1945년 초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을 미군이 탈환하는 장면이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스페인어로 ‘은둔자’라는 뜻을 지닌 에르미타는 마닐라만을 바라보는 풍광 좋은 지역으로 필리핀 지배계층과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호화 주택가였다. 스페인계 혼혈 대지주인 로호 가문의 저택 역시 이곳에 있다. 저택에 거주하는 이는 두 자매 펠리시타스와 콘시타.

미군의 진주와 일본군의 퇴각이 엉킨 가운데 혼란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콘시타는 자신을 강간한 일본군 병사를 살해하지만 결국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되며 남의 눈을 피해 딸을 낳아서는 수도원 보육원에 버리듯이 맡긴다. 그 아이가 소설 주인공인 에르미타.


“작가는 자기 민족 위해 글써야”


에르미타를 수도원에 맡긴 뒤 콘시타는 미군 장교와 결혼하여 필리핀을 떠난다. 홀로 남겨진 에르미타는 수도원에서 힘들게 성장한 뒤, 마침내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고 이모 펠리시타스가 지배하는 저택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에르미타의 처지는 운전수와 요리사 등 집안의 하인들과 다를 바 없다. 이모는 학비와 최소한의 용돈을 줄 뿐 가족으로서의 애정과 관심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결국은 에르미타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집안의 일원으로서 제 몫의 유산을 요구하자 가차없이 내쫓아 버린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에르미타는 결국 ‘고급 창녀’의 길로 접어든다. 그의 선택에는 그에게 영문학을 가르친 여교수 호노라토의 말이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만약 매춘을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 신념 없이, 생존 때문이 아니라 오직 돈을 위해 하는 행위라고 가정하면, 누가 진짜 매춘부일까요? 주위를 돌아보세요. 그런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어요. 가면을 쓰고 인격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지요. 정치가, 제복을 입은 사람들, 기업가, 작가들 그리고 언론인들도 아주 많지요. 그래요. 교수들도 예외는 아닐 거예요.”(146쪽)


 에르미타가 자신의 몸을 무기로 돈과 권력을 획득해 가는 과정은 다소 통속적으로 그려진다. 그의 미모는 너무도 출중해서 모든 남자들이 그 매력에 빠질 정도다.

그는 분명 비천하고 속된 행위에 자신을 맡기는 인물이지만, 영혼의 고결함과 인격적 품위를 결코 잃지 않는다. 그의 주위에는 그의 몸뚱이를 탐하는 수컷들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과 소통하고 그의 인격을 보호하고자 하는 남자들 역시 모여든다. 저택 운전수의 아들인 맥, 전직 역사교수이자 현직 브로커인 롤란도 크루즈, 그와 결혼하는 미국인 사업가 앤드루 메도스 등이 그들이다.


매춘은 부패와 타락에 대한 은유


통속의 절정은 에르미타가 친어머니 콘시타와 이모 펠리시타스, 외삼촌 호셀리토 삼형제에게 가하는 복수극이다. 그는 미국으로 가서 어머니의 남편인 존 콜리어를 유혹한 다음 그에게 자신의 출생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가정을 파탄시킨다. 펠리시타스는 오래된 성추문을 언론에 터뜨림으로써, 그리고 동성애자인 호셀리토는 젊고 매력적인 청년을 동원한 끔찍한 사건을 통해 각각 사회적으로 매장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에르미따>가 에르미타라는 불우한 창녀의 개인적 복수극만인 것은 아니다. 소설의 더 큰 무게 중심은 작가가 보는 바 조국 필리핀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에 두어진다. “이 소설에서의 매춘은 필리핀인들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은유”라고 작가는 말했다.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전직 역사교수 롤란도 크루즈의 기록은 필리핀 사회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미래에 대한 이상을 갖지 못한 군인들, 탐욕에 빠져서 제 욕심만 차리는 정부 관료들, 아부와 굴종밖에 모르고 분노할 줄 모르는 식물처럼 변해버린 국민들을 생각해봐.”(492쪽)


그나마 자신을 포함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았던 크루즈가 권총 자살을 택한다는 결말은 작가의 현실 인식이 그만큼 비관적이라는 뜻일 수도 있겠다. 작가는 “소설의 논리에서 보면 그의 자살은 일종의 ‘심리적 정당화’에 해당한다. 그리고 소설 바깥과 관련지어 말한다면, 필리핀에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의 자살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창녀 시절 에르미타의 동료였던 아니타의 딸 릴리아는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의문사를 당한다. 아직 릴리아가 죽기 전, 에르미타는 아니타에게 “나는 릴리를 존경해. 그 애는 오래전에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어”(431쪽)라고 말한다. 이혼하기 전의 미국인 남편 역시 “내가 만약 필리핀 사람이라면 난 이미 혁명가가 되었을 거야”(445쪽)라고 에르미타에게 말한다.


 소설은 이처럼 혁명의 필요성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지만, 소설 속에서 그 혁명은 현실로 몸을 바꾸지는 않는다. 소설을 마무리하는 것은 크루즈의 울음이다. 크루즈가 에르미타 앞으로 남긴 유서의 마지막 대목: “아름다운 조국이 내 민족에 의해 파괴되어가고 있기에 나는 울고 있어. 폭력과 무질서, 슬픔과 절망이 넘쳐흐를 날들이 오게 될 것을 알기에 나는 울고 있어.(…)여기 신주쿠에서 길을 잃고 나는 울고 있는 거야.”(494쪽) 크루즈의 울음이 곧 작가의 울음임은 물론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 2007.4.27 한겨레 책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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