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책을 써서 책을 죽이지 말라

송담(松潭) 2007. 6. 25. 17:14
 

 

책을 써서 책을 죽이지 말라



서양문명은 양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한 문명이었다. 왜 하필 양떼일까?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가 유럽에 전해진 7세기 이전까지 유럽대륙에서 종이 역할을 한 것은 `양피지(羊皮紙)`였다.


이름 그대로 양 가죽을 벗겨 석회수에 2주일 정도 담근 다음 털을 밀어내고 팽팽하게 잡아당겨 말리면 양피지가 만들어졌다. 유럽에서 양피지는 지식과 정보를 기록하고 유통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성서 한 벌을 제대로 옮기려면 무려 500마리 양을 죽여야 했다. 다행히 종이가 일반화되면서 책 때문에 양들이 희생되는 일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무의 희생이 뒤따랐다. 종이 1t을 생산하려면 30년생 나무 17그루가 생을 마감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연간 종이 소비량이 700만t 정도라고 하니 1억2000만그루 나무가 매년 한국에서 쓸 종이를 만들기 위해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서점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들은 나무들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산물이다. 그러나 과연 수십 년 풍상을 이겨낸 나무를 베어 버릴 만큼 가치를 지닌 책들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에서만 1년에 4만5000종, 1억2000만 권 정도 책이 쏟아져 나온다.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누구나 사연 없는 삶은 없다. 그러나 그 사연들을 모두 책으로 쓸 필요가 과연 있을까. 저녁을 먹으며 자녀들에게 한번쯤 들려주고 말 정도의 신변잡기를 책으로 써내는 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다.


책은 가치 있는 경험과 폭넓은 성찰, 해당분야의 탁월한 지식과 진정성이 잘 연마된 문장에 담겨 나올 때만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 못한 책은 자기 착각이거나, 다소 과장된 일기에 불과하다. 물론 나오는 책 모두가 명저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근 세태는 지나치다.


화제의 인물이 등장했다는 보도가 나오면 불과 몇 달 만에 책이 나온다. 당연히 대필작가가 써준 것이다. 전문가들이 썼다는 책들도 짜깁기가 많다. 수준 이하 책을 시대의 명저라고 우기는 사례가 다반사다. 아무리 살펴봐도 같은 주제로 쓰인 기존 책을 넘어서는 지점이 없고, 독창성이나 치열함도 없고, 하다못해 대중성도 없는 책을 명저라고 우기는 심리는 뭘까.


감동과 충격이 오래 가는 책이 줄어들수록 책은 서서히 죽어간다. 대중에게 책에 대한 신뢰를 주기는커녕 실망만 안겨주는 책이 우리 활자문화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대중은 이제 책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건강한 두 다리를 가졌다고 해서 `나도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훌륭한 축구를 보면서 즐길 뿐이다. 높은 수준 축구를 직접 하지는 못하지만 그 축구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대중이 있기에 축구는 존재한다. 그런데 왜 책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못할까. 읽고 쓸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왜 우리는 모두 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이른바 `스토리의 힘`을 논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전 국민이 저서를 한 권씩 갖는 운동을 하자는 의견도 나오는 모양이다.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힘이 되는 스토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적인 수다나 감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스토리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해리포터 시리즈`다.


그러나 해리포터는 하늘에서 어느날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조앤 롤링은 이미 5세 때 동화를 썼을 만큼 타고난 문장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고, 직장에서는 틈만 나면 글을 쓴다는 이유로 해고됐을 정도로 글에 미친 사람이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그녀가 이혼 이후 에든버러의 작은 셋집에서 가난과 싸우며 10여 년에 걸쳐 쓴 것이다. 누가 감히 그녀를 운 좋은 이야기꾼이라고 말하는가.


책을 함부로 써서 책을 죽이지 말자.


허 연 문화부차장 / 2007.6.25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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