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섹스
사라 러딕은 <성도덕 문제>라는 논문에서 ‘더 나은 섹스
better sex'의 조건으로 성적 쾌락, 완전성, 자연스러움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들었다. 성적 쾌락이란 “흥분과 만족이라는 그 자체의 조건들을 지닌 일종의 감각적 쾌락”이다.
섹스는 어떤 명분으로 포장돼 있어도 본질적으로 감각적 쾌락이다.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쾌락, 육체적 쾌락을 경멸하던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섹스의 쾌락이 감각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회. 윤리적 이유로 억압했을 뿐이다.
실존 철학의 주장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실존인 고깃덩어리 육체가 이성보다 앞선다. 즉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전에 고깃덩어리인 육체다. 섹스에서 쾌락은 중요한 조건이고, 이 조건이 감각적 쾌락이라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결과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보는 본질주의적 사고방식은 섹스의 감각적 쾌락을 격하시킨다. 인간에게 몸뚱이가 먼저라는 것을 받아드릴 때 감각적 쾌락으로서 성적 쾌락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사라 러딕은 더 나은 섹스의 두번째 조건이 완전성이라고 한다. 성행위가 완전해지려면 자신이 흥분해야 하고, 자신의 흥분으로 인해 흥분된 상대방의 정욕에 자신이 다시금 흥분될 때 성행위의 완전성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의식에 의해 되살아난 육체다.”라고 했다.
더 나은 섹스의 세 번째 조건은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러움의 반대말은 성적 도착이다. 사라 러딕은 자연스러움의 기준으로 “생식 작용에 도움이 된다거나 혹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들고 있다. 이는 사라 러딕 본인도 인정하듯이 매우 애매한 기준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동성애는 생식 작용에 도움이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기 때문에 성적 도착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를 무작정 도착으로 보기도 곤란하다. 동성애란 동성자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 대문이다. 섹스가 갖는 자연스러움의 기준은 결국 각 문화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랑과 섹스는 어떤 관계일까? 사랑 없는 섹스도 가능하고 섹스 없는 사랑도 가능하다. 물론 사랑과 함께하는 섹스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 없는 섹스가 가능하다면 사랑은 섹스의 필요조건이 아니며, 사랑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섹스가 가능한 것도 아니므로 사랑은 섹스의 충분조건도 아니다. 나는 사랑과 섹스는 근본적으로 별개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사랑이 클수록 더 나은 섹스가 될 가능성이 크므로 즉 사랑이 클수록 감각적 쾌락이 커지며 또한 서로 육체에 대해 흥분하는 완전성도 커질 것이며 자연스러움도 범위를 넓힐 것이다. 하지만 더 나은 섹스가 사랑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랑과 섹스는 여전히 별개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탁석산/ ‘철학 읽어주는 남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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