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관계를 끊고 싶어도 ‘두려움’ 때문에
아주 오래된 연인, 아니 엄밀히 말해서 아주 오래된 불륜 남녀들의 이야기입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만나고 있는 장수 커플들의 이야기이지요. 이들 중 두 커플은 유부남과 처녀이고 두 커플은 유부남과 유부녀 커플입니다.
먼저 8년 된 유부남과 처녀 커플입니다. 그들은 처음 2년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행복한 시간의 증거인 두 번의 임신 중절, 셀 수 없이 많은 헤어짐과 감격적인 눈물의 해후,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몸부림의 세월이었지요. 그 2년이 지난 후, 헤어지고 싶지만 말 못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만 말 못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싸움과 지지부진한 화해와 여러 번에 걸친 부인의 전화, 갈등과 번민과 후회와 원망과 억울함과 분노와 절망과 혐오의 감정으로 자살과 복수를 꿈꾸는 6년을 보냈습니다. 도합 8년의 세월을 애인 어깨에 얹어주고, 그 남자는 아내 핑계를 대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숨바꼭질하던 친구 버리고 엄마가 불러서 집에 가버린 아이처럼, 그렇게 가버렸지요.
다음은 10년 된 유부남과 처녀의 이야기입니다. 위 커플과 유사한 패턴의 시간을 보내고 26살이었던 처녀가 이제 36살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어떻게든 끝내고 싶지만, 그가 애인과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아직도 결혼을 꿈꾸고 있는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을 때, 직장에 찾아와 멱살잡고 집으로 쳐들어올거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명문대학 출신의 남자는, 남편의 외도를 꿈에도 모르는 아내가 잘 키워놓은 아이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그는 이제, 10년의 세월을 함께 하면서 3번의 임신중절을 하고 서른여섯이 되어버린 고졸의 애인을 조용히 떼어버릴 방법을 찾느라 여기저기 상담중입니다.
이제 유부남과 유부녀의 이야기입니다. 7년된 분들이지요. 가정생활이 편치않은 유부녀가 유부남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가정은 더 엉망이 됐고, 만나는 세월 내내 이혼을 꿈꿨습니다. 꿈만 꾸며 버티기에 7년의 세월은 길지요. 남자의 사랑의 속삭임만으로 약발이 먹히는 세월이 지나고, 사랑한다면 나를 택할거라는 기대로 버틸 수 있는 한계도 넘어버린 어느 날이 왔습니다. 이렇게 계속 만나야한다면 헤어지는게 낫다는 내용의 길고 긴 메일을 보냈지요. 언제나처럼 붙잡을거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단 한줄의 답을 보냈습니다.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썰렁한 이별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8년된 유부남 유부녀의 이야기입니다.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가정을 깰 생각이 전혀 없는 두 사람은 한번도 무리하지 않고 관계를 이어왔습니다. 8년이 되도록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잘 처신해 왔지요.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그들은 6시에 퇴근해서 8시까지 만나고 집에 갑니다. 그들은 이제 부부나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남자가 남편과 다른 점은, 여전히 변치않고 사랑을 속삭인다는 겁니다. 자신의 가정을 위협하지 않는 상대에게 질릴 이유도 헤어질 이유도 없는 그들은, 이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10년도 거뜬해 보입니다. 남자가 특정 유부녀 동료에게 지나치게 친절해서 양다리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제외하면, 그들은 오늘도 아무 문제없이 행복합니다.
나름대로 험한 세월을 잡초처럼 살아오신 분들께 제가 뭐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그저 배우자를 속이고 정절을 버리는 위대한 결단의 결과가 겨우 저것밖에 안되는게 좀 황당하고, 그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한없이 미약한 것이 안타까울뿐입니다.
송강희의 누드토크/2007.4.6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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