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억과 인식체계
영화 <은행나무 침대>를 보면 황 장군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이야기는 많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데, 사랑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하다는 메세지가 보는 이를 눈물짓게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과연 가능할까? 한 보고에 따르면 남녀간의 사랑은 보통 3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한다.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이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사랑한 것일까? 정우성과 심은하가 사랑에 빠졌다고 하자. 심은하는 스무 살이었고 무척 아름다웠다. 이뿐만 아니라 돈도 많고 성격까지 좋았다. 이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어느덧 심은하가 쉰 살이 되었을 때 그 많던 재산이 다 날아가고 거의 무일푼이 되었다. 하지만 성격은 여전히 좋았다. 이런 경우에도 정우성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을까? 심은하가 예순 살이 되었을 때, 미모는 완전히 살아지고 몇 푼 안 된 재산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때문인지 이제는 성격마저 이상해 졌다. 이때도 정우성은 심은하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 동정심에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사람이 갖고 있는 속성은 변한다. 위에서 보듯이 미모, 재산, 성격은 변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속성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보는 게 옳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을 한다면 어떤 사람의 속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우리는 사실상 속성을 사랑하면서도 아닌 것처럼 말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어떤 점이 좋아요?”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다 좋아요,” 아니면 “그냥 그 사람 자체가 좋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런 답은 사실 위장된 것이다.
우선 “다 좋아요”라는 답은 아직 사랑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결점이 보이지 않는 것뿐이지만,
“그 사람 자체가 좋아요.”라는 답은 철학적으로 따지기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이는 속성과 실체에 관한 오래된 철학 문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플라톤 이래 주요한 논쟁거리였다.
고대에서 근대까지 많은 철학자가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실체와 속성 간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힘을 쏟았다. 예를 들어, 사람은 외모부터 성격까지 모든 것이 변해도 영혼이라는 실체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곧, 사람이 죽은 뒤 모든 속성이 사라져도 실체인 영혼은 변하지 않고 남기 때문에,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고 다른 영혼과 구별될 수 있는 개별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영혼의 존재는 기독교의 구원론과 관련하여 상당히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서양에서 근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흄은 실체란 이름만으로 존재하고 속성은 사실만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흄의 주장에 따르면 마음이란 관념의 다발이다. 젓가락 하나하나를 관념으로 볼 때, 젓가락을 한 다발로 묶을 수 있듯이 관념이 한 다발을 이룬 것이 마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젓가락 다발이 존재하듯 마음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변화하는 속성의 터로서 실체는 없다. 변하지 않으면서 어떤 마음을 그 마음으로 만드는 신비한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 마음이 실체를 갖지 않고 연속된 관념의 다발일 뿐이라면 변하지 않는 마음,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마음이 관념의 다발이라 해도 사랑이 지속될 가능성은 있다. 관념의 다발을 구성하는 구성원 중에 기억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관념의 다발을 이루는 수많은 구성원 가운데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할 때 지금의 오감이 전하는 인상과 그 인상안에서 생겨난 관념만을 의지 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서, 아니 더 중요한 요소로 기억을 활용한다. 지금 나는 지하철이 들어오는 것을 본다. 이와 동시에 지하철을 탄 기억과 지하철이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지하철을 어떻게 타야 하는 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이런 기억이 없다면 지금과 같은 관념의 다발은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과정과 현상이 인식에서 일반적이라면 사랑도 예외일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속성이 변하여 예전 속성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한 기억과 예전의 아름다웠던 기억, 그리고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새로운 다발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사랑이 지난 뒤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열정을 불사르며 사랑을 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사랑이 끝난 뒤 허망함을 맛본다. 불꽃같은 사랑이 지난 뒤 남는 것은 허망함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성장했음을 느낀다. 사랑을 통해 스스로 많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왜 다른 결과가 남을까? 두 사람이 사랑하는 동안에 형성된 관념의 다발이 각자 달랐지만, 그 다발들도 이미 살아졌다.
남은 것은 기억 뿐이다.
그런데 기억은 기존의 인식 체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한 사람은 사랑을 매우 소중한 가치로 여겼고 다른 사람은 밥 먹는 것과 같은 일상으로 여겼다면,
동일한 사랑 체험을 했으면서도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 판단들이 각자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일한 사랑도 서로 다른 색깔을 띤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과 인식체계에 따라 사랑의 색깔이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사랑은 허망한 것으로도, 또는 영원한 것으로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탁석산 / ‘철학 읽어주는 남자’중에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모름지기 좋은 기억을 가지라.
사랑은
당신이 더 성숙해 가는
성장통(成長痛)이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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