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우는 고향으로 돌아가자
내게 설날은 아버지가 돌아오는 때이다. 어릴 적 나의 아버지는 겨울이면 다른 지방으로 일을 나가셨다. 어느 해에는 호남선 터널 보수공사를 하러 가셨다. 아버지는 대개 설 대목에서야 돌아오셨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싸락눈이 수차례 창호문을 치고 길디 긴 고드름이 녹았다 얼었다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던 날 아버지는 가만히 한 뭉치의 목돈을 내놓으셨다. 그러면 어머니는 찬바람이 맴돌던 빈 쌀독을 한 말의 쌀로 채우고 옷가게에 가 누이들과 내 설빔을 장만해주셨다.
어머니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나선 시장은 설 대목을 보느라 흥성흥성했다. 떡집에는 말랑말랑한 가래떡이 쏟아지고, 생선집에는 꽝꽝 언 동태들이 연신 팔려 나가 이내 동이 났다.
동네에는 튀밥장수가 들어와 손풍로를 돌리고, 어머니는 탁주를 받고 돼지고기 두어 근을 끊어 제사상을 차리는 큰집으로 미리 보냈다. 공장으로 돈 벌러 간 누나도 돌아왔다. 어머니는 맏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아랫목에 공깃밥을 묻어두었다.
큰 통에 절절 끓는 가마솥물을 받아 목욕을 하고 새 내의로 갈아입고 머리맡에 설빔을 개켜두고 잠이 들면 조리장수가 마당까지 들어왔다 썰물 빠지듯 나가는 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지금껏 그토록 행복했던 시간이 또 얼마나 있었을까.
설날로 건너가는 설레는 시간이었다.
설날에는 객지로 나갔던 가족들이 모여들어 빈집 같던 집안은 모처럼 붐빈다. 시인 백석의 시 ‘여우난골族’은 설날의 집안 풍경을 아주 실감나게 표현한다.
“그윽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안방)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아랫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공기놀이)하고”
그렇게 간만의 해후에 웃음이 쏟아지고 밤잠을 설쳐 다음날 아침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에서 민물새우에 무를 썰어 넣고 끓이는 ‘무이징게국’ 냄새가 나도록 늦잠을 잔다고 쓰고 있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이 모이면 살림을 숨기지 않아서 좋다. 넉넉하면 넉넉한대로 또 모자라면 모자라는대로 그대로 족해서 좋다. 후끈 달아오른 아랫목에 둘러 앉아 솜이불 밑으로 맨발을 넣고 흉금을 털어놓으니 좋다. 서로의 걱정을 덜어 주어 좋다. 큰 솥을 걸어 한솥밥을 먹으니 좋다. 식었던 아궁이마다 붉은 불이 지펴지고 소매를 걷어 전을 부치고 돼지고기에 탁주가 여러 순배 오가니 좋다.
이처럼 고향에 가면 차별이 없어 좋다. 고향은 사람을 가슴에 품을 줄은 알아도 내칠 줄은 모른다. 어서 어서 오라는 손짓은 해도 싫은 내색은 없다. 고향은 관대하고 너그럽다. 시장처럼 잇속을 따지지 않는다. 김이 물씬물씬 오르는 떡시루 같은 게 고향이고 가족이다.
사람들이 설날을 맞아 아이를 앞세워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맑은 술 한 병을 받아 가는 이도 있고, 사과 한 상자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도 있다. 명절을 맞아 우리들 마음은 잠시 잠깐 고향의 뜰에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래 낮밤 없이 고향은 우리들을 기다려 왔다. 까치 우는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의 안부를 밤새 묻자. 손을 꼬옥 잡고 얼굴을 마주 보고 따뜻한 덕담을 나누자.
우리들 가슴 속으로 맑고 반짝이는 은하가 흐를 것이다.
문태준/시인
(2007.2.16 광주일보)
참으로 부러운 가족입니다.
문태준 시인님의 ‘가족 에세이.’
그저 꿈으로만 그리는 향수입니다.
이 땅의 많은 가족들이여!
진정한 평화를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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