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존재의 심리학

송담(松潭) 2006. 9. 14. 11:55
 

빠르면 그만큼 많이 놓친다.



소외니 존재니 하는 단어는 현대생활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지만 대부분 이 말을 쓰는데 어딘지 부담스러워 한다.

실제로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듯하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라도 우연한 사건을 통해 병이 깨지듯 이 단어들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체험할 때가 있다. 필자 역시 우연찮게 이 단어들의 의미를 실감한 적이 있다. 우선 소외에 대한 이야기다.


서울남부법원에 근무할 때였다. 2년마다 북한산에서 열리는 전국 법원등산대회에 남부법원팀 선수로 참가했다. 전국의 법관과 직원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여서 꽤 중요한 행사였다. 우리팀은 법관과 직원 4명으로 구성됐고 우승을 당연한 목표로 정했다.

대회 당일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날씨였다. 4명이 출발선에 나란히 서자 징소리와 응원단의 함성 속에서 기분이 한껏 상기됐다. 20여 팀이 1분 간격으로 출 발했다.

그러나 곧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얼마 안돼 앞서 출발했던 다른 팀을 만났고, 이어 또다른 팀까지 추월했다. 연달아 추월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도 잠시 쉬고 있는데 뒤에 출발한 팀이 이번엔 우리를 추월하는 것 아닌가.

등산 내내 이런 상황이 반복됐다. 이러다 보니 어느 한 곳에서도 느긋하게 쉴 수 없었다. 가을 아침의 인수봉과 단풍이 장관을 이뤄 평소 같으면 느긋하게 즐겼을텐 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오직 빨리 가는 것만이 급선무였고 초반의 유쾌하던 팀원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더구나 한 사람이 전날 과음한 탓으로 처지기 시작하자 팀원들은 은근히 짜증을 내는 듯했다.

 

이런 식으로 등산이 끝났다. 하지만 등산 후 신경은 더 피곤해졌다. 시간에 쫓기는 조급함, 다른 팀에 대한 과민함으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등산의 즐거움은 마음 내키는 대로 걷고 쉬는 자유로움과 여유에 있는 것 아닌가.

처음부터 우리 페이스대로 느긋하게 걸으면서 경치와 대화를 즐기는 편이 더 좋았 을 것 같았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가을날 하루를 놓쳤다는 아쉬움만 커졌다. 등산은 열심히 했지만 정작 등산의 알맹이라 할 자유로움은 철저히 사라진 상태, 이른 바 '소외'를 철학적으로 체험한 것이었다.

소외란 외면은 있지만 내면이 텅빈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후 나의 실생활 각 방 면에서 소외적인 방식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게 됐다.


'존재'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실감할 기회가 있었다. '남성의 중년'을 주제로 연구하는 분과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중년 남성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과 느낌, 생각을 솔직히 고백(?)해 그에게 연구자료를 제공하는 자리였다.

처음에는 쑥스러웠지만 질문에 답하면서 모처럼 내 삶을 조명하고 반성하며 새로워짐을 느꼈다. 질문서 중 '최고의 행복감과 환희를 느낀 때가 언제인가'라는 항목이 있었다. 꽤 오래 걸려서 끙끙대며 7~8개의 순간을 기억해냈다. 그런데 순위까지 붙여 행복목록을 정리한 후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행복목록에 써놓은 순간이 막연히 생각하던 행복의 개념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느 날 저녁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장엄한 장면을 본 때'가 행복목록 중 최고 경험이었다. 초여름 저녁, 비가 그쳐서 산으로 산책나갔다가 무심코 두터운 구름 사이로 저녁햇살이 갈라지면서 드러나는 파란 하늘을 보았다.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꼼짝 않고 하늘만 바라본 기억이 생생하다. 행복목록의 나머지 순간들도 대개 비슷했다. '한밤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6세 된 큰 딸 과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자고 침묵하며 앉아있던 일' '운전중 베토벤의 현악4 중주 135번을 들으면서 무아지경에 빠졌던 때….'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신나고, 성취감을 느낀 큰 일이 많았는데 이보다 오히려 작은 경험들만 포함된 것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성취감과 인정받음이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이들 질문은 존재의 심리학을 제창한 매슬로가 사용하는 '절정 경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경험을 뜻하는데 이를 체험하는 사람은 '더 참된 자신이 되고, 존재(Being)의 핵심에 더 가깝게 접근하며, 더 인간적으로 된다'고 한다.

나도 행복목록에 올린 순간을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내면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느낌, 나 자신의 전체가 휩싸이고 흔들리는 느낌을 가졌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에 관련된 체험임을 알게 됐다.

객관적, 외면적 중요성에 관계없이 오직 존재에 가까워지는 체험만이 진정한 행복을 준다는 사실. 성취감이나 인정받음은 존재감보다 훨씬 아래의 감정인 셈이다.

이런 존재감에 대해 아프리카에서 선교사 생활을 한 미국인 존 테일러가 아름다운 글을 남겼다. 아프리카 친구가 그를 찾아오면 방으로 들어와 짧게 인사하고 바닥에 앉는다. 그도 몇 마디 말을 건넨 다음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한다.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말을 나눌 필요가 없다. 친구는 30분쯤 말없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며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간다. "당신을 충분히 보았어요."

친구는 어떤 정보나 대화도 원하지 않고, 함께 존재함을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방식이다. 요사이 우리가 나누는 사교나 대화방식에 비하여 얼마나 본질적인가.


우리가 존재감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급속하게 돌아가고 있는 이 시대, 우리는 구조적으로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달리는 바퀴의 테두리를 잡지 않고 바퀴의 축을 잡으면 우리는 언제나 존재의 중심, 고요함, 진정한 자기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한 번 더 하늘을 올려다보고, 좀 더 느리게 걸어본다. 구름 별 달 나무를 바라보고 스치는 바람을 느껴 보자.

'재미없는 등산'은 하루의 일이지만, 매일매일 그러한 경쟁에 휩싸여 ‘재미없는 인생’을 살 수는 없지 않는가.


윤재윤 / 서울고법 부장판사(2006.3.11 매일경제, 세상사는 이야기)

 

 


 

< 참 고 >


존재의 심리학


『존재의 심리학』은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시자로서 심리학뿐만 아니라 경영학, 언론학, 사회학 등 다방면에서 응용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매슬로우의 이론을 집대성한 책이다. 매슬로의 가장 유명한 저작으로서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자신이 강의한 내용과 여러 논문을 모아 1962년 초판이 발간되었다. 사후인 1999년 3판이 출간되었으며, 독자들은 매슬로의 여러 가지 심리 이론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과 인본주의 심리학의 깊은 사상적 뿌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프로이트의 대척점에 서서 선량한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키우다!


매슬로는 인본주의적이면서도 개인을 초월하는 심리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러한 심리학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혐오나 좌절이 아닌 사랑과 연민에 근거한 심리학이다. 이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매슬로는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중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본성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착한 사람들이 모여 ‘좋은 세상’을 만들어나가는데 기여할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자기실현’ 이론이나 ‘절정경험’ 이론은 개념의 보편 타당성을 확립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정통 과학주의에서 비주류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그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여러 가지 심리학 이론이 새롭고,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심리학으로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과학적 방법 및 과학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그의 사후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세상에 대한 매슬로의 견해는 주류 심리학으로 편입되어 하나의 조류가 되었으며, 매슬로는 인간 본성 이론에 변화의 물결을 가져온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매슬로의 주요 이론 소개


(1) 욕구 5단계설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에 대해 학계 최초로 학문적인 연구를 시도했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누고 여기에 등급을 매겨 각각의 욕망이 어떻게 다른 욕망에 지배받는지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다. 매슬로가 정의한 5단계 욕망은 다음과 같다.


생리적(Physiological) 욕구⇒안전(Safety)에 대한 욕구⇒애정과 소속(Social) 욕구⇒자기 존중(Esteem) 욕구⇒자기실현(Self-Actualization) 욕구


(2) 자기실현

매슬로는 이 다섯 가지 욕구 가운데서 특히 자기실현 욕구를 중요시했으며, 이 자기실현 욕구란 “인간이 갖는 가장 최상위 욕망으로, 자기 계발과 목표 성취를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자세”라고 정의했다.

매슬로는, 자기실현 욕구는 다른 욕구와는 달리 일정한 한계점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자기실현 욕구는 욕구가 충족되면 될수록 더 강해지며, 이 욕구가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결핍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매슬로는 이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 자기실현에 성공한 사람들의 심리적 특징을 직접 조사하고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연구했다. 그는 링컨, 간디, 아인슈타인, 루스벨트, 스피노자 같은 위인들의 특징을 면밀히 관찰했으며 그 결과 역사적인 위인이라고 해서 자기실현한 사람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지는 않으며, 자기실현이라는 가치 자체가 불완전한 것으로 평생을 두고 노력해야 하는 끝없는 과정이라고 설파하였다.


(3) 절정경험(Peak Experience)

부모가 되는 경험, 신비적 또는 광활함에 대한 경험, 자연에 대한 경험, 미학적 지각, 창조적 순간, 치료적 또는 지적 통찰력, 오르가즘의 경험, 특정 운동에서의 성취 등을 맛보는 순간이 있다. 이처럼 최상의 행복감과 완성감을 느끼는 순간에 이때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인지적 현상들을 한마디로 일반화하여 매슬로는 절정경험이라 부른다. 이러한 절정경험을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이 경험하는가를 매슬로는 자기실현 정도의 척도로 삼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도 절정경험을 경험하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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