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을 능가하기에 충분한 꽃, 작약
이웃집 토부다원 박윤규사장 사모님께서 정원 작약꽃밭에서 봉오리만 맺힌 작약을 한 아름 안고 왔습니다.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작약이 비를 맞으면 금방 시들어버리니 집안에 꽃꽂이를 해놓고 보면 더 오래 꽃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항아리 꽃병에 봉오리만 맺혀있는 것이 차츰 잎이 열리더니 화려하게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습니다. 집사람은 작약을 바라보며 ‘꽃중에 꽃’이라는 모란보다 더 예쁘다고 탄성했습니다. 센스있는 이웃 때문에 집안에서도 화창한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2024.5.7)
제국대장공주와 작약
마당 한 귀퉁이에 붉은 작약이 피었다. 진분홍 꽃잎이 매력적이다. 작약과 모란은 사촌간이지만, 모란은 크고 화려한 색깔의 꽃을 자랑하는 나무이고, 작약은 상대적으로 꽃이 작으면서 꽃잎 개수도 적은 풀이다. 모란이 젠체하는 꽃이라면, 작약은 낯을 가리는 꽃이다. 화기(花期)가 짧은 것도 부끄러움 때문일 게다. 특히 백작약의 함초롬한 모습은 때론 가련하게도 느껴진다. 그에 따라 모란은 부귀영화, 작약은 수줍음 등을 상징한다. 중국에선 작별할 때 작약을 꺾어주던 풍습에 따라, ‘가리(可離)’, 즉 이별의 꽃이기도 하다. 작약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충렬왕 22년에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갔다. 이듬해 진왕(晉王)이 자기 나라로 귀환할 때 황제가 그의 관저로 가서 전송했는데, 왕과 공주도 그 연회에 참가했다. 술자리가 흥겨워지자 공주가 노래를 부르니 왕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해 5월에 귀국했는데, 때마침 수녕궁에 작약이 만발했다. 공주가 꽃 한 가지를 꺾어 오라 하여, 오랫동안 손에 잡고 완상하더니 감회를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현성사에서 사망했는데 향년 39세였다.”(<고려사> 권 89 열전 2)
고려 충렬왕의 부인 제국대장공주는 칭기스칸의 손자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이다. 고려 원종의 맏아들인 충렬왕은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혼인 당시 공주의 나이는 19세, 충렬왕은 39세였다. 충렬왕은 이미 왕비(정화궁주, 貞和宮主)가 있는 유부남이었으니,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게다가 낯설고 물선 타국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고려사>에는 제국대장공주의 타향살이 애달픔이 전해진다.
머나먼 이국땅에 시집와서, 어원(御苑)에 핀 작약을 보며 그녀는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에 원나라 무종(武宗)은 ‘청헌(靑軒)의 도리(桃李)와 같이 꽃답던 청춘이 찬 이슬 맞은 갈대같이 갑자기 시들었다’며 슬퍼했다. 후세 사람들은 공주의 죽음을 두고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가슴속의 병이 되었을 것이라 풀이한다. 중국에서는 작약의 작(芍)자가 ‘약속한다’는 약(約)자와 발음이 비슷하여 ‘약속의 꽃’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이별의 꽃이자 재회를 약속하는 꽃이었던 작약. 제국대장공주의 심상을 그대로 전하는 꽃이라 할 만하다.
고려 26대 충선왕의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의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이다.
이선 /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2024.5.7 경향신문)
숲속에서의 사색(思索)
뒷산 임도(林道)를 걸으면서 숲속 여기저기를 살펴봅니다. 첫 번째 눈에 들어온 나무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나무입니다. 올곧고 매끄럽고 시원하게 뻗었고 거침없어 보입니다. 성공한 나무 같습니다.
다음은 바위위에서 자란 나무입니다. 단단한 바위를 뚫고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 그 위대한 힘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도 강한 의지로 온갖 시련을 물리치면 저렇게 반석(盤石)위에 거목(巨木)처럼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가지 많은 나무입니다. 옆으로 나온 가지들은 태풍과 비바람에 시달려서 잎이 없고 죽은 가지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고 많은 시련을 견뎌낸 나무입니다.
막지 막으로 담쟁이넝쿨 같은 식물이 나무를 감싸고 있는데 나무가 죽어 있습니다. 덩친 큰 나무가 연약하고 작은 이파리가 있는 식물들의 집중공격을 받았습니다. 담쟁이넝쿨이 큰 나무를 고사(枯死)시키고 말았습니다.
숲은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생존경쟁이 이루어지는 전쟁터이기도 합니다.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란다고 하는데 너무 가까이 있으면 공생하지 못하고 죽는 나무들이 생기나 봅니다.
숲속에서의 삶과 죽음, 인간도 자연도 태어나고 소멸하는 한시적 존재입니다. 묵묵이 걸으며 생각해 봅니다. 거대한 우주속에 한갖 티끌같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다가 또 어디로 가는가.
(2024.4.9)
산길을 걷다가 중간에 큰 나무 아래서 잠깐 쉽니다.
나그네의 지팡이
호수가 보이는 곳에서는 걸음을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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