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흐르는 강물처럼

송담(松潭) 2021. 1. 2. 14:12

흐르는 강물처럼

 

예술은 왼손에서 탄생한다

 

 

왼손잡이

 

강변 풍경이 몹시 수려한 시골 마을의 장로교 목사에게 두 아들이 있다. 목사는 몸소 두 아들에게 두 가지 공부를 시킨다. 하나는 낚시이고 다른 하나는 글쓰기이다. 낚시는 창조주인 신의 리듬을 깨닫는 공부요, 글쓰기는 신의 뜻을 깨우치는 공부라는 이유에서다. 글쓰기에서 아버지가 강조하는 것은 간단함과 명료함이다. 그래서 아들들이 글을 써오면 그것을 반으로 줄이라며 돌려보내고 반으로 줄여서 고쳐오면 거기서 반으로 줄이라고 요구하며 돌려보내곤 했다.

 

낚시 공부는 더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실전에 임하기 전에 상당한 시간 동안 집 뒷마당에서 메트로놈의 네 박자에 따라 열시와 두시의 시침 방향 사이로 낚싯대를 춤추듯 휘두르는 동작부터 익힌다. 목사에 따르면 낚시는 신의 박자를 깨닫는 예술이다. 낚싯대를 담그는 것. 고기가 입질하는 순간에 채올리는 것이 모두 이러한 박자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형은 이러한 아버지의 교육을 원칙대로 증실히 따른다. 잘잘못을 가릴 때도 그의 판단기준은 언제나 아버지가 정해 준 틀에 의존한다. 그러나 아우는 달랐다. 낚싯대부터 그는 왼손으로 잡는다. 오른손잡이의 정통을 고집하는 아버지가 그 나쁜 버릇을 고치려 온갖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뿐 아니다. 아우는 모든 일에서 늘 주어진 원칙이나 틀에 앞서거나 뒤처지거나 했다. 변칙을 향한 욕망, 일탈 충동, 위반에 대한 유혹이 언제나 그를 휘몰았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종종 끼니를 굶게 하는 등 가혹한 형벌로 다스려보았으나 아우는 마지막까지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낚시보다 책 읽기나 글쓰기를 즐기던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큰 도시의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였다. 나중에는 대학원까지 진학하여 박사학위까지 받고 교수가 된다. 그러나 아우는 고향 근처에 있는 전문대학을 근근이 졸업한 뒤 지방 신문의 기자로 일하게 된다. 교수가 되어 여름방학 때 7년 만에 고향으로 금의환향한 형은 기자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아우와 강가로 낚시를 간다. 그때 형은 낚싯대를 휘두르는 아우의 동작을 유심히 살핀다. 그것은 더 이상 아버지가 가르쳐주던 메트로놈 네 박자 리듬도 아니었고 두시와 열시 시침의 변역에서만 이루어지는 줄놀림도 아니었다. 이 왼손잡이 낚시꾼은 스스로 ‘그림자 던지기’라는 독창적인 몸동작으로 자신의 고유한 리듬에 따라 날렵하게 낚싯줄을 담갔다 낚아채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형의 눈을 부시게 한 것은 이 그림자 던지기의 낚싯법으로 낚아올린 많은 고기가 아니라 낚시 그 자체였다. 어망을 매는 데부터 미끼를 끼워 낚싯대를 강물에 드리운 다음 자신만의 독특한 리듬에 따라 낚싯대를 휘둘러대다가 입질하는 순간에 채어 은어를 낚아올리고는 다시 그 팔딱거리는 고기에 생채기 하나 내지 않고 낚싯바늘을 분리한 뒤 어망에 넣는 몸놀림 사이에 어느 하나 군더더기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아우와 낚싯대와 강물이 하나 되어 흘러가는 흐름 같은 것이었다. 형은 아우의 낚시가 단지 훌륭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라 느낀다.

 

그때 형은 말한다. “아우는 강물 위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낚싯대와 더불어 강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건 낚시가 아니라 차라리 예술이었다.” 그림자 던지기 낚시로 동생이 낚아올린 은어는 몇 마리 되지 않았다. 양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7년 만에 낚싯대를 처음으로 잡은 자신이 더 많은 고기를 낚았다. 그러나 형은 결코 자신이 승자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낚시만이 아니었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아우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가며 살고 있었다. 인디언 여자와 사귈 뿐 아니라 인디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술집에 애인과 기어이 떼를 쓰고 들어가서는 둘만의 독무대인 양 격렬한 춤을 추기도 하고 끗발이 보일 성싶은 날이면 주저 없이 월급을 몽땅 걸어 도박판에 끼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방학이 끝나서 고향을 떠나던 날 아침 형은 경찰로부터 아우가 총격당한 시체로 길바닥에 버려져져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현장에 다녀온 형이 오랜 침묵 끝에 넋을 잃은 부친에게 말한다. "손목이 무참히 으스러져 있었어요." "어느 쪽이냐?" "원손이었어요." 그렇다. 그것는 에트로놈의 네 박자를 거부했고 모든 기존의 틀에 저항했으며 그럼으로써 아버지의 굴레를 벗어나려 하던 바로 그 손이었다.

 

아름다움의 형이상학

 

로버트 레드퍼드가 감독하고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낚시에서 시작하여 낚시로 끝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낚시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전혀 다른 것, 곧 아름다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이다.

 

형의 회상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연대는 두 형제의 어린 시절부터 형이 7년 만의 귀향을 마치고 떠나려는 날 아침 영문 모를 아우의 주검을 보고 온 뒤 참척의 슬픔에 빠진 부친과 대화를 나누는 그 시점까지 걸쳐진다.

 

추억 속의 아우는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안타깝다. 그러나 이 모든 감정에 앞서서 먼저 형이 느끼는 것은 아우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먼저 그것은 주관의 감정이다. 아우가 아름다운 게 아니라 '아우가 아름답다'고 형이 느낀 것이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두 가지 잘못된 믿음이 생겨난다. 첫째는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대상이 같다는 것이다. 이 둘을 한데 뒤섞어 생각하는 데서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혼란이 시작된다. 쉽게 말하면 '아름다운 것' 은 우리가 보거나 듣게 되는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것' 혹은 '저것' 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 은 다르다. 그것은 보거나 듣거나 만질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란 오직 ‘생각하는 것’ 뿐이다.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려면 아름다운 것, 가령 소녀, 꽃, 노을, 단풍, 시, 그림 같은 것을 넘어서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넘어서서 나아간다’는 것은 눈으로 보기를 멈추고 사념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 곧 '추상' 이다. 결국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려면 형이상학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얼핏 추상, 형이상학 등이 난해하게 들리리라. 하지만 그 실행은 생각처럼 어려운 게 아니다. 가령 다음과 같이 간단한 물음을 던져보는 것만으로 우리는 형이상학의 문턱에 가볍게 들어설 수 있다. ‘무엇이 꽃을 저토록 아름답게 만드는가?’, ‘왜 형은 동생이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이런 물음들은 '아름다운 것'을 넘어서서 '아름다움' 을 묻고 있다. 이러한 넘어섬이 곧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metaphysics은 이처럼 ‘보이는 것physilca'을 '넘어선다meta'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형이상학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절대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것을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잘못된 믿음은 아름다움이나 아름다운 것이 나와 상관없이 내 바깥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 자체 고독하게 저 혼자 있는 것은 절대로 아름다운 것일 수 없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아무도 없는 사막에 홀로 떠오른 달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냥 달일 뿐이다.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는 미남이거나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다. 그냥 아무도 없는 섬에 남겨진 고독한 인간일 뿐이다. 나르키소스의 경우는 어떠냐고? 그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아름답게 느낀 게 아니다. 나르키소스로 하여 물에 빠져 죽을 만큼 아름다움에 도취하게 했던 것은 홀로 있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때 나르키소스는 그 현장에서 그 영상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자로서 존재했다.

 

이러한 두 가지 잘못된 믿음을 털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확신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첫째 아름다움은 개별적 대상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을 생각하려면 형이상학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형'은 이러한 확신들 위에서 있다. 이 형이 없어도 아우는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운 아우'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그룹 동방신기는 나와 상관없이 그들 자체로 너무 멋지고, 텔레비전 속 CF 모델 전지현은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변함없이 스스로 아름다우리라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동생이 형에 의존하듯이 세상의 모든 멋진 사람들은 나에게 의존해 있다. 동방신기가 변함없는 멋진 그룹으로 남아 있도록 해주는 절대 조건은 먼저 그들을 그렇게 멋진 사람들로 경험하는 내가 존재하는 것 이다. 아름다움이 나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것은 전적으로 나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즉 우리가 아름다운 것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에 의존해 있다. 의존주체가 의존객체보다 아래 놓이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온당한 배치가 아니다. 배우 이영애가 아름다운 것은 전적으로 이영애 탓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그녀가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내 주관의 형식 덕분이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왜 모장과 여희를 보면 새는 달아나고 물고기는 물 밑으로 숨는가?" 새나 물고기가 갖고 있는 주관의 경험 형식으로는 당대 중국의 최고 미인인 이들을 아름답게 만들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멋진 비유다. 아름다움은 감상자의 주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아름다운 사람들 앞에서 기 죽지 말자, 그들의 아름다움은 정말 우리 손 안에 놓여 있으니 말이다.

 

 

인생 그리고 예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분명 인생과 예술은 그 길이가 다르다. 그러나 그 기준을 떼어놓고 본다면 인생과 예술은 숱한 유사성을 공유한다. 이를테면 우리의 인생을 태어날 때 각자에게 주어진 단 한 개의 캔버스에 한 편의 그림을 남기는 과정으로 비유해 볼 수 있으리라,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그릴 것인가, 무슨 색을 칠하고 어떻게 칠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캔버스 앞에서 어떻게 그릴까 고민하는 화가들의 창작 과정과 다를 바 없으리라.

 

인생이 정말 한 편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멋진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는 왼손 쓰는 삶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왼손을 으스러뜨리려는 폭력은 도처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에 한 편의 그림으로 남게 되는 삶이라면 멋진 그림으로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보라, 지금 당신의 왼손은 어느 주머니 속에 있는가.

 

이왕주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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