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서양미술 개론

송담(松潭) 2021. 1. 7. 14:42

서양미술 개론

 

미술사 흐름도

 

 

 

고대미술 고대 그리스 로마미술

 

기원전 4천년 경 이집트에 이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나 다른 삶을 누린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사후관은 이집트 미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대신 영원성을 담아내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어떤 화가들의 사명은 죽은 자의 영혼이 생활하기 위한 묘실 안에 현세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벽화, 피라미드, 스핑크스 이러한 영원성을 반영한 종교적 미술작품의 예다.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작품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다. 그리스에 와서 예술은 독자적인 가치로서 목적 그 자체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작품은 조각이나 건축에서 성과가 컸다. 파르테논 신전이나 에렉테움 신전이 이를 대표한다. 그리스 미술이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제국 건설이었다. 대제국의 문화를 헬레니즘이라고 하는데, 헬레니즘을 번역하면 그리스 문화와 같은 문화인 것이다.

 

대제국의 헬레니즘문화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서른세살에 요절하면서 와해되어갔고, 결국 신생제국 로마에 흡수되었다. 이틸리아 반도의 작은 마음에서 출발한 로마는 1세기 무렵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전역을 지배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정복에 성공함으로써 평소에 갖고 있었던 그리스 미술에 대한 동경을 현실에서 단번에 접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중세미술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 → 로마네스크→ 고딕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추구했던 그리스 로마 미술은 중세가 되면서 자취를 감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우선 중세 초기의 환경적 요인이 있다. 중세 초기라 할 수 있는 5백여 년간은 전쟁과 약탈이 반복되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두 번째 이유는 내적인 측면으로 그리스도교의 탄생 배경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특성은 종교와 관련되지 않은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세 초기 미술은 단지 문맹자들에게 신의 섭리와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었다. 11세기 후반에 그리스도교가 유럽전역에 퍼지자 교회건축이 빈번해지고 이에 따라 건축술과 예술이 함께 발전한다. 당시 건축과 미술양식을 로마네스크라고 한다.-로마풍 정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

 

단단하고 웅장한 것이 특징인 것. 대표적인 것으로 피사의 성당. 우선 종교적으로 볼 때 당시의 교회는 지상에 만든 신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교회라는 공간은 신이 내제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악한 세계로부터 종교적 이념을 보호하는 전투적 공간이었다. 그런 까닭에 건축은 성과 같은 모습을 하였다.

건축상은 아직 건축공법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을 높게 올리기 위해서는 두꺼운 벽 때문에 창문은 좁고 작게 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실내는 어둡고 차분한 느낌을 낼 수밖에 없었다.

 

11,12세기 2백여 년 동안 로마네스크 양식이 유행했다면 이후 2백 년 간은 고딕 양식이 유행했다. 고딕은 건축술 발전과 함께 벽의 뚜께는 엷어졌고 첨탑들이 등장했다. 벽이 얇아지면서 큰 창문을 낼 수 있게 되었고 유리에 장식하는 것도 크고 화려하게 되었다. 고딕 양식의 이러한 특징은 실내에 들어선 사람에게 로마네스크 건축과는 상반된 분위기를 풍겼다. 정면에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들어왔다. 이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천국에 대한 동경과 신의 영광에 대한 감정의 고양을 경험했을 것이다. 고딕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사르트르 대성당이나 노트르담 대성당 있고 한국의 명동성당이 고딕 양식을 띠고 있다.

 

신의 영광과 권위를 드러내거나 교회의 교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예술이 사용되었다. 다만 초기 그리스도교적 미술을 지나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거치연서 미술적인 요소가 반영되고 확장되었다.

 

 

르네상스 미술 -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로코코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세의 주인공인 왕과 영주들은 물질적으로 장원을 소유함으로써 지배권력을 획득하고, 정신적으로는 신으로부터 지배의 정당성을 얻었다. 이들과 대립하며 성장한 부르주아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서 공장을 소유하면서 물질적 측면에서 권력 기반을 확보하였으나 정신적 측면에서는 아직 종교에 귀속되어 있었다. 부르즈아는 신을 대체할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탐색했고, 결국 인간의 이성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 교회와 유일신에 대항하는 인간적 가치가 필요했던 부르주아들은 고대 사회로 관심을 돌렸고, 고대 문학들을 재탐색하는 분위기가 학계와 예술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를 르네상스 라고 한다.

 

르네상스는 '부활', '다시 태어남' 을 의미하는데 여기서의 부활과 재생은 고대 문화의 부활과 재생을 말하며, 동시에 인간적 가치의 부활과 재생을 의미한다. 이탈리에서 시작한 이 문예부흥운동은 전 유럽으로 획산되었다. 다만 14세기 부터 16세기 사이에 일어났건 르네상스는 과도기적 측면이 컸다. 중세를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종교적 측면에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경제적 측면에서도 자본주의를 도입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한 가시적인 계급적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르네상스를 중세의 마지막에 등장한 문화로 평가할 것이냐 아니면 근대의 시작으로 볼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중세와 근대 사이에 르네상스가 있어서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변화가 시도되었다는 정도만 기억하자.

 

르네상스의 미술은 어떤 시기보다도 많은 천재가 등장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이성적 규칙을 통해 객관적인 정확성을 토대로 창작되었고, 동시에 조화와 균형이라는 미의 이념이 이상적으로 구현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그는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와 경쟁 관계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단번에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린 <피에타> 가 있다. 피에타란 자비를 배푸소서 라는 이탈리어다. 그 외에도 다비드상 과 모세상 이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르네상스 미술은 17세기가 되면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규칙적인 측면에 대한 반발에 직면한다.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는 상대적인 회풍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 바로크라고 한다.

 

 

바로크, 로코코 미술

 

14-16 세기의 르네상스 미술 이후 17세기와 18세기 는 각각 바로크와 로코코의 시대였다. 르네상스 미술이 이성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바로크와 로코코는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 사조였다. 다만 바로크는 무겁고 어두운 반면, 로코코는 밝고 가볍다는 뜻이다. 우선 바로크는 포루투칼어로 "비뚤어진 진주" 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단정하지 않고 우아하지 않다는 경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로코코는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전 유럽에서 유행했는데 그것은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무렵 왕권이 약화되고 부르주아나 귀족이 향유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우리가 영화에서 프랑스의 화려하고 장식이 많으며 향락적인 사교계를 흔히 볼 수 있는데 그때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는 시기가 로코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초기 근대 미술, 신고전주의 와 낭만주의

 

 

신고전주의

 

르네상스 이후 근대미술은 크게 초기 근대와 후기 근대로 구분하여 미술적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초기근대 미술은 로코코의 퇴폐미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다. 이들은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로 돌아가고자 했기에 신고전주의로 불린다. 사실 신고전주의는 화풍에 있어서는 새로울 게 없다. 그리스 미술로의 복귀가 이들이 지향하는 추구점이다. 예술사에서는 이성과 감정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반복에서 등장한다.

 

르네상스의 이성에 대한 반대가 바로크와 로코코의 감성을 낳고 이에 대한 반대가 다시 신고전주의의 이성 추구를 낳은 것이다.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는 다비드 와 엥그르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프랑스 전세의 미술적 흐름을 고전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로 바꾸는데 기여했다. <마리의 죽음>, <소크라테스의 죽음>, 앵그르는 <그랑 오날리스크>가 있다.

 

다비드 <마리의 죽음>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이성적이고 염숙하며 절대적인 측면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신고전주의가 고대를 모방하고 재현하려고 할 뿐, 개인의 감성과 주관의 탁월성을 소홀히 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창작자의 주관과 표현을 강조하고 자유로운 공상과 환상의 세계를 그림의 대상으로 하는 낭만주의 미술이 탄생했다. 감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바로크, 로코코와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화려하고 장식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화가의 강렬한 내면을 외부세계에 투영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작가의 주관적 해석과 내면의 감성을 중시하는 까닭에 낭만주의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천재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격정적이고 창백하며 고뇌로 가득 찬 전형적인 천재의 이미지는 이때 확립된다.

 

제리코 <메듀사호의 뗏목>

 

낭만주의 미술의 창시자 격인 인물은 제리코다 그의 작품 <메듀사호의 뗏목> 은 당시 미술계의 큰 피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당시 실제사건을 소재로 격렬한 움직임, 강력한 명암대비 색채효과 그리고 극적인 상황 등을 모범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이다. 제리코의 친구이자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들라크루아는 후에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대표작은 너무도 유명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며, 낭만주의의 선언서 처럼 여겨지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도 그의 작품이다.

 

 

후기 근대 미술,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실주의

 

사실주의는 리얼리즘과 같은 말로 낭만주의가 보여주는 극적이고 과장된 미적양식에 대한 저항으로 부터 탄생했다. 낭만주의가 화가의 상상력과 이상적인 세계의 창조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사실주의는 사실적 그림을 그리길 요구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다양하다는데 있다. 무엇이 사실인가? 눈에 보이는 자연과 만물을 단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사실인가? 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림 대상을 선정함에 있어 사실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남루한 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사실주의 이전의 그림들은 역사적인 영웅들을 용맹하게 그린다거나, 도자기 같은 피부를 가진 누드의 여신을 그린다거나 한껏 치장한 귀족을 아름답게 그렸다. 사실주의 미술은 진짜 사실을 그려내려고 노력했다. 노동자의 남루한 삶이나 옆집의 가난한 이웃, 노동의 고됨을 가감 없이 묘사했다.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은 쿠르베르, 사실주의의 시작을 알린 인물인 동시에 사실주의 미술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오르낭의 매장> 당시의 사실주의는 예술에서 배제되었던 일상을 예술의 소재로 데뷔시켰고, 예술계와 대중에게 예술의 의미를 새롭게 고민하게 했다.

 

쿠루베르 <오르낭의 매장>

 

 

인상주의

 

작가의 주관과 감성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인상주의를 낭만주의와 같이 상대주의적 미술로 분류했으나 인상주의는 고전주의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에 대해서도 저항하며 탄생했다. 19세기말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탄생한 인상주의도 사실주의 처럼 낭만주의의 비현실적이고 과장적인 화풍을 거부하고 일상적인 삶과 자연을 그려내려고 했다. 다만 사실주의가 민중의 가난과 노동이라는 정치, 경제적인 측면의 소재를 채택함으로서 이념적인 측면이 드러난다면, 인상주의는 단지 눈에 '보이는 것' 을 가감 없이 그려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지금 이 순간 정말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려 했다. 인상주의 화풍의 시작이면서 완성이었던 인물은 '모네'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인상, 해돋이>, <수련, 연작>,<일본식 정원> 이 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해가 뜨는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을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했는지 놀라올 따름이다.

 

모네 <인상, 해돋이> 

 

 

전기 인상주의 단계를 거쳐 독자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인상주의를 넘어서려고 노력한 화가 집단을, 인상주의 이후에 나타난 화가들이라는 의미로 후기 인상파 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는 고흐, 고갱, 세잔 등이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고흐와 고갱이 특별히 인기가 많다. 특히 고흐는 삶의 처절함과 그림의 독특하고 화려한 색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화가들 중 미술사적 측면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다룰 인물은 세잔이다. 세잔은 근대를 마무리하고 현대미술을 탄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세잔의 <정물화> 는 관점이 어긋나 보인다. 이 지점에서 세잔은 인상파와 결별한다.

 

폴 세잔 <정물화>

 

 

현대미술, 입체파와 추상파.

 

현대미술을 단순화해서 한마디로 정리하면 ‘새로움에 대한 강박’ 정도가 될 것이다. 미술가들은 새로움을 찾기 위해 그림의 대상을 변화시켜있다. 종교와 영웅 에서 상상과 주변으로, 그리고 현실과 인상으로 변화되었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종류의 대상은 없어 보인다. 여기서 부터 현대미술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화가가 보는 시점으로 사물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화가의 단일 시점을 포기하고 다양한 시점에서 본 사물의 모습을 2차원의 화폭에 담아내기로 했다. 즉 앞과 옆과 뒤를 모두 하나의 화폭에 담는 그림을 탄생시킨 것이다. 현대주의 미술의 그림은 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가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아름다움의 추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림은 기괴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새로운 시각에 크게 공감하는 화가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이러한 그림을 입체주의라고 불렀다.

 

 

사물을 바라보는 단일한 시점을 유지하는 것이 예술의 필수조건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림에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하다는 법은 없다. 대상의 존재는 예술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X씨는 실재한 대상도 상상의 대상도 모두 없애버리고 그리는 대상이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폭에는 이제 색과 선과 면들의 유희만이 남았다. 이로써 추상미술이 탄생한 것이다.

 

입체파

 

큐비즘이라고도 부르는 입체파는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 운동이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세잔이 사물의 기하학적 분석과 다양한 시가점의 적용을 도입한 이래로,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 큐비즘이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피카소가 있다.

 

피카소는 새로운 미술 양식을 연 세계적인 예술가로 인정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입체파의 시작을 선인하는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가 있다. 특히 게르니카는 자신의 고국 스페인이 내전을 치르고 있던 당시에 나치가 게르니카 지역을 폭격한 사건을 담고 있다.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추상미술

 

입체주의는 그림의 대상을 분석을 하고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으나, 어쨌든 특정 대상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구상미술의 오랜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 무렵 아예 그림의 대상을 그림에서 제거하는 추상미술의 화풍이 탄생했다. 추상미술의 탄생으로 미술은 이제 구상미술과 추상미술로 구분되었다.

 

현대미술에서 처음으로 순수추상미술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화가는 러시아 출생의 칸딘스키다. 그는 실제하는 대상을 화폭에서 안벽하게 제거하고 색의 덩어리와 단순한 선과 면으로 시각적 효과를 강조했다.

 

정리하면 입체주의는 그림의 대상을 분석하고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고, 추상미술은 실재하는 대상을 완벽하게 제거하고, 색의 덩어리와 단순한 선과 면으로 시각적 효과를 강조했다.

 

오늘날의 미술, 예술의 주체를 흔들다.

 

현대 미술의 주요한 두 화풍으로서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을 살펴보았다. 미술의 역사에서 새로움을 찾는 시도는 언제나 미술의 대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대상의 선택과 표현의 역사가 미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미술의 본질인 새로움에 대한 욕망은 남아있다. 이제 현대 예술가들은 그동안 작품밖에 있던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화가를 예술활동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오늘날의 미술은 미술의 주체를 흔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미술을 하는 행위를 예술로 포함하는 예술사적 맥락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단정적으로 정리한다면 현대 미술은 미의 추구라기보다는 새로움의 추구다. 그리고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예술의 대상을 변화시켰고 다음으로 예술의 주체를 변하시켰다. 아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출처 : 마음의 지도 / 서양미술 개론, 김태균

 

 

 

 

 

 

 

바로크 미술

 

카라바조, <성 예로니모>, 캔버스에 유화, 112x157cm, 1605~1606년,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을 위한 엄청난 경비 조달을 위해 가톨릭교회는 면죄부까지 팔았다. 그런 행태를 비난하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회는 위축되기는커녕, 멀어져가는 신도들의 마음을 더 강렬하게 사로잡기 위한 '반종교개혁' 미술을 주도했다. 성당 건축은 더욱 화려해졌고, 조각은 역동적으로 바뀌었으며, 그림에서는 시선을 한순간에 낚아채는 주제와 기법이 발진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 17세기 미술을 후대 사가들은 '바로크'라고 불렀다. 바로크는 '인그러진 진주 Perola Baroca'라는 뜻의 포르투갈어로 르네상스를 진주로, 바로크를 흠결 있는 진주로 보는 다분히 편향적인 용어이다. 르네상스 미술이 조화와 균형감과 정적이고 우아한 채색을 자랑한다면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이고, 자극적이며,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이탈리아 바로크의 거장, 카라바조의 작품은 빛과 어둠을 극단적으로 대비하고, 표정과 자세를 과장해 마치 연극 무대에 선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림은 라틴어로 성서를 번역한 학자이자, 은수자인 성 예로니모를 그린 것으로 주인공과 주요한 기물들에만 빛이 떨어지고 배경은 칠흑처럼 어둡게 마감하는 테네브리즘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테네브리즘은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해골은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교혼을 떠올리게 한다.

 

 

표현주의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컨버스에 유화, 92x73m, 1890년,

오텔로 크뵐러 뮐러 미술관

 

 

 

표현주의 미술은 르네상스 이래 미술이 추구해온 세상의 재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다. 그들에게 있어 미술은 대상의 외관을 베끼듯 그리는 게 아닌, 어떤 감정이나 감각 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고흐나 뭉크 등이 꼽히는데, 이들은 빛에 따른 색의 변화를 그림으로 풀어낸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어떤 대상을 보며 일어나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인상주의자들이 바깥세상이 내눈 안으로 들어와 찍히는 대로를 그렸다면 표현주의자들은 자신의 감정, 정서가 바깥으로 나가, 대상에 찍힌 것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은 빛이 변화시킨 색을 그렸지만, 표현주의자들은 화가의 '마음'이 변화시킨 색, 나아가 형태를 찾아 그렸다. 1905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나타난 야수파'리 와 다리파 등은 표현주의의 한 갈래이다. 프랑스의 야수파가 형태를 단순화하고, 색채의 자율성을 추구하여 결국 장식성으로 나아갔다면 독일의 다리파 등은 색채와 형태를 과장, 왜곡하여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에 대한 날선 저항감을 표현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추상으로 가는 풍경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캔버스에 유화, 73x91.9cm, 1902~1904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인상주의의 짧고 활달한 선이 그려낸 그림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진실만을 좇았다. 강렬한 햇살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의 눈· 코·입 같은 세부적인 모습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면, 사실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몸의 윤곽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인상주의의 그림들은 대상의 정확한 형태보다는, 빛에 의해 바스러진 색들이 보여주는 순간의 인상에 가깝다. 그러나 인상주의 이후 화가들은 망막에 맺히는 것 이상의, '대상의 본질'에 다시 접근하고자 했다. 내 눈에 순간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대상이 원래 가진 단단한 형태를 그림으로 남기고자 한 것이다.

 

세잔은 생 빅투아르 산의 모습을 보면서, 그 산이 가진 가장 결정적인 형태를 그림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는 “자연을 원통과 구체, 원추형으로 해석하라 '라고 주장했는데, 산의 전체적인 모습, 즉 영원히 변하지 않는 단단한 모습을 삼각영으로 잡은 뒤 그 산에 떨어지는 빛이 만들어놓은 색들을 여러 색 면으로 그려 넣었다. 들과 집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기하학적인 형태와 색 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세잔의 그림은 곧, 대상을 단순화해 표현하는 추상으로 가는 큰길을 터준 셈이다.

 

 

신조형주의

 

 

피트 몬드리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Ⅱ >, 캔버스에 유화, 46x46c㎝, 1930년,

취리히 미술관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죄다 그 모습이 다르지만, 그 다름을 제거하다 보면 결국 본질에 닿을 수 있다. 예컨대, 다 달라 보이는 산과 사람의 얼굴에서 차이들을 제거하면 형태면에서 산은 삼각형, 사람의 얼굴은 원으로 남는다. 이들 삼각형과 윈도 계속 그 다름을 제거하다 보면 선과 면으로 남는다.

 

가장 근본적인 색은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이다. 다른 색들은 모두 이 세 가지 색을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다양해진다. 몬드리안(1872~1944년)의 추상화는 이러한 생각의 반영이다. 그는 자연을 모방하여 그리거나, 감정이 극도로 개입된 표현주의 미술을 경계했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몬드리안은 무질서한 자연에서 찾아낸 가장 궁극적인 근원을 수직선, 수평선, 삼원색과 검정, 하양의 무채색으로 표현해 가장 완벽한 질서를 화면 속에 담아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작업을 '신조형주의'라 명했다. 그의 작업은 감정을 다 도려내 버린 듯이 차갑고,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추상의 기원이 되었다.

 

몬드리안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다 사선을 사용하는 동료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자연의 본질은 수평과 수직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여 결국 결별까지 하게 된다. 그는 심지어 곡선도 감정적이라며 비난했다.

 

김영숙 / ‘1페이지 미술365’중에서

 

 

 

재현미 표현미 인식미

 

 

인간은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가졌다. 그걸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게 미술이고 청각적으로 구현하는 게 음악이다.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들도 벽에 낙서를 하거나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욕망을 표현한다. 잘 그렸다 못 그렸다 하는 건 어른들의 시선에서 내리는 평가일 뿐이다. 그림도 다른 사람들보다 잘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뭔가를 그려서 의식을 수행해야 하는 경우에 그들에게 일을 맡겼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명이 발달하여 거대한 부족이 형성되거나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계급이 형성되었고, 정치나 종교를 장악한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위해 혹은 학습을 위해 그림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제는 훨씬 숙련되고 전문화된 화가라는 직업군도 양성되었다.

 

왕은 자기 권위를 강화하는 그림을 원했다. 예를 들어 해적의 손자가 왕이 되었더라도 왕이 된 이상 할아버지를 그럴싸한 인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아주 기품 있고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얼굴로 그려줄 것을 화가에게 요구할 것이다. 교회에서 그림은 문맹자가 대부분인 신도들에게 종교적 가르침을 전하는 수단이었다. 신성함과 존엄성이 최대한 드러나야 했다. 화가는 주문대로 그림을 그려주고 생계를 꾸렸다. 주문자가 요구하지 않은 그림은 그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전적으로 인물과 사건이 주요 대상이었다.

 

흔히 그림 잘 그린다고 할 때 우리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신라의 솔거가 화신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도>를 그렸는데 새들이 진짜 나무인줄 알고 날아들었다가 벽에 부딪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그 그림은 사실적 채색화였을 거라고 추정된다. 실제 사물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그렸을 때 우리는 그림 잘 그렸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런 경우 미적 판단의 기준은 재현미(再現美)가 된다. 흥미롭게도 그런 그림을 보고 “와우, 이 그림은 사진 같아!”하고, 멋진 사진을 보면서는 “오, 이 사진은 마치 그림 같네!”라고 표현한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을 감행한 세력은 왕을 처형하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수많은 성직자를 처형했다. 곧 이어진 산업혁명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이전의 신분사슬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신의 노동을 제공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생략....)

 

등장하는 모델도 이전의 왕이나 성인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었다. 주문자의 눈이 아니라 화가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기존의 법칙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미적 판단의 기준은 ‘재현’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뀌었다. 표현미(表現美)의 시대가 온 것이다. 동시에 미적 판단이 객관에서 주관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그리는 사람’이 주체가 된 것이다. 표현미에 가장 충실했던 그림들이 바로 ‘인상파 미술’이다.

 

내면 깊숙이 억눌려 있던 자아의 표현이 분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인상파 미술의 등장은 이후 다양한 사조의 출현을 야기했다. 19세기 후반의 서양미술은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른 속도로, 그리고 다양한 기법으로 확장되었다. 그 끝자락쯤에서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 등에 의해 대담한 화풍이 등장했다. 그들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대담하게 자신과 세계를 대응시켰다. 이제 대상의 묘사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피카소는 회화의 평면성을 벗어나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고, 마티스는 원근과 농담 등의 방법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대담한 생략과 강조로 단순화시키는 그림을 시도했다. 칸딘스키는 아예 대상을 해체하여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봄을 표현하기 위해 이전의 화가들은 봄꽃을 그리거나 봄의 들판을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내가 그려내고 싶은 것은 그런 대상이 아니라 봄에 대한 나의 느낌 그 자체다. 대상을 그려내면 화가도 감상자도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대상에서 벗어나야만 나와 세상 혹은 대상과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다. 혹은 새로운 방식으로 해체하거나 재구성해서 그 관계성을 표현해야 한다. 우리가 추상화 혹은 비구상화라고 부르는 그림들의 정신은 그런 것이다.

 

해석은 반드시 감상자와 공유될 필요는 없다. 철저하게 자신의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많이 공유될수록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터였고, 화가는 유명세를 누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현대서양정신이 ‘자유로운 개인’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그림에 대한 미적 판단의 기준은 더 이상 재현미나 표현미가 아니라 인식미(認識美)로 전환하게 된다. 이른바 현대미술이 인식미를 토대로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한 추상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울 수밖에 없다.

 

표현미의 시대가 ‘화가의 눈’ 즉 그리는 사람을 주체로 세웠다면 인식미의 시대는 ‘관람자의 눈’으로 해석하면서 모든 개인이 각자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관람자의 눈이 여전히 화가의 눈을 따라야 한다는 강박과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김경집 / ‘인문학은 밥이다’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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