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2020년 여름

송담(松潭) 2020. 7. 9. 15:11

2020년 여름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니 이제는 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밖에 나가 술자리도 가졌는데 올해 들어 거의 술자리를 갖지 못했으니 따분해졌나 봅니다. 어제가 하지이고 이제 초여름인데 더위가 너무 빨리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서울이 35도가 넘는 폭염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위를 받아드리고 순응하는 글을 접했는데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글을 쓴 유명 작가가 아직 옥탑방에서 살고 있고 에어컨도 이제야 장만하겠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더위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에어컨 아래서 편하게 지내는 것이 얼마나 미안하고 송구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옥탑방 물탱크

 

(...생략...)

 

이제 막 하지가 지났다. 하지. 태양이 가장 가깝고 가장 높은 때.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 가장 길다는 것은 더 이상 길어지지 않는다는 얘기. 태양이 멀고 낮아진다는 얘기. 이제부터는 낮이 줄어들고 밤이 길어진다는 얘기. 하지를 향한 걸음이 동지를 향한 걸음으로 바뀐다는 얘기. 이 성급한 인간아, 하지 지났다고 동지 타령이냐. 태양의 위력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단 말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말씀은, 열대야는 아직 오지도 않았다는 말씀. 여름은 아직 멀고도 멀었다는 말씀. 지금부터가 바로 태양에 공손하게 굴어야 할 때라는 말씀.

 

그래서 나는 옥탑의 태양을 원망하는 대신 친하게 지내기로 했다. 태양의 힘을 맘껏 빌리기로 했다. 태양과 더불어 살기로 했다. 태양과 친한 것들을 가까이 두기로 했다. 옥탑의 로망이 무엇이었더냐. 뽀송뽀송하게 마른 빨래와 옥상정원 아니더냐. 좋다, 일단 널고 보자. 옷가지야 이불이야 수건이야 행주야 걸레야 수세미야, 이불 속까지 다 뒤집어 내다 넌 다음, 소파와 침대 커버를 벗기고 속싸개까지 벗겨 빨고 기어이 매트리스까지 끌어냈으니. 오로지 무언가를 널 목적으로 집을 구한 사람처럼 널고 또 널다 보니, 아무래도 올가을에는 고추도 사다 널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어쨌거나 빨래를 걷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볕에 잘 마른 빨래가 주는 안식을. 향긋하게 뽀송한 이불을 품에 안았을 때 감아 도는 뜨끈한 전율을. 이것이 바로 옥탑과 태양의 수혜다.

 

(...생략...)

 

호박덩굴과 고추와 쌈채소들로 채워진 옆집 마당과, 장미가 지기 시작하니 능소화를 피우기 시작한 앞집 마당과, 여남은 개가 넘는 장독을 보유한 뒷집 마당의 풍경을 공유하는 것은 덤. 우리는 모두 옥탑 마당에 올라온 태양의 전사들, 모두 함께 살아가며 옥탑의 로망을 완성하고 있나니. 나는 이토록 우주적 존재다, 뿌듯한 심정으로 외쳐보지만, 아무래도 제가 올여름 이곳에서 에어컨 없이는 도무지 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저 지구에 해를 끼치며 살아가는 인간일 뿐이다 고백하게 되는, 물탱크의 여름.

 

천운영 / 소설가

(2020.6.22. 경향신문)

 

 

 꽃밭에서

 

 

 

< 2 >

 

한 채의 집

 

 

 

사연을 담은 한 채의 집. 부동산 돈벌이로 굴리는 여러 채의 집이 아니다.

 

선량한 사람들의 소중한 한 채의 집.

 

정성 어린 손길에 피어난 꽃들, 친구의 방문으로 지펴진 온기로 훈훈한 집.

 

버스가 떠나듯 우리도 결국 집에서 떠난다.

 

집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다. 머물며 사는 동안 집을 사랑하고 집의 보호를 또한 받을 뿐.

 

누군가 찾아온다고 하면 청소를 하고 빵을 사고 커피콩을 볶는다.

 

(2020.7.9. 경향신문 임의진의 시골편지 중에서)

 

 

 

< 3 >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 시집 <기쁨이 열리는 창> 중에서

 

 

7월에는 제가 먼저 이 시로 한여름의 첫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들 힘겹게 살던 1950년대의 초등학교 시절 학교 교실과 복도를 치자 열매로 물들이던 추억도 있어 해마다 수녀원에 가득 피는 치자꽃을 보면 꽃잎과 잎사귀뿐 아니라 그 독특한 향기도 매우 반갑고 정겹습니다. 꽃이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릴 보고 늘 예쁘다고 말들 하시지만 필 때도 질 때도 사실은 참 많이 아프답니다’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나의 꽃밭이 되게 하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향기로운 웃음을 꽃피우려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깊은 인내와 강한 의지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살아갈수록 더욱 알게 됩니다. 갈수록 더 힘들게 여겨지는 한여름의 폭염을 어찌 견딜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에 나만의 여름나기 수련법 몇 가지를 적어봅니다. 첫째, 실제로 수영은 못 가도 독서의 바다에 깊이 빠지기. 둘째, 덥다는 푸념이 습관적으로 나올 적마다 태양을 예찬하며 옆사람에게 덕담 하나씩 건네기. 셋째, 누가 마음 상하는 말을 하면 너무 더워서 본의 아니게 짜증을 내는 거니 그만의 향기를 찾아내고 기억하며 좋은 마음으로 참아내기 등 구체적인 실습을 시작하려 합니다.

 

(2020.7.9 경향신문 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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