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갑자기 아침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져 서리가 내렸다.
새벽에 집에서 가까운(3Km) 상사호 물관리관으로 운동을 갔다.
낮에는 기온이 많이 오르고 청명한 가을 날씨가 된단다.
상사호에는 물안개가 피어있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홀로 걷는 아침시간이 좋다.
(2019.10.10)
공원에도 단풍이 들었다.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가 새겨진 조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水石과 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 하리.
공원 광장에서 계단을 타고 한참 내려가니
댐을 막은 곳이 있었다.
철조망은 댐관리 보안상 설치해 놓은 것 같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서 계단수를 세어보니
262계단이었고 아침운동에 적당했다.
집에 돌아오니 여름내 피었던 백일홍이
가을까지 건재한 모습으로 날 반겼다.
아침을 먹고 거실에 앉으니
반달창으로 파란 가을 하늘이 보였다.
(오전 9시 30분)
오후에는 가을햇볕을 바라보며
한 편의 시를 읽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지 오래인
어머니의 음성을
들은 느낌이다.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에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오늘(10.17)은 보성에서 남강 정상현선생님 내외분과
광주에서 운해 이용린국장님 내외분께서 순천에 오셨다.
모처럼 어른들을 모시게 되었다.
순천 예술테마파크에 들렸는데 함께 기념사진은 찍지 않았고
나만 미술관에서 그림 두점을 담아왔다.
< 1 >
루벤스(1577~1640, 독일), 키몬과 페로 Cimon and Pero(1630)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젊은 여인이 부끄럼도 없이 젓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거의 벗다싶이 한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습니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가 그렸고 지금은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국립미술관 입구에 걸려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제목은 키몬 과 페로(cimon and pero) 입니다.
박물관에 들어서다가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개 당황스러워 합니다. 딸 같은 여자(페로)와 놀아나는 노인(키몬)의 부적질한 애정행각을 그린 작품이라면서 불쾌한 감점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런 포르노 같은 그림이 국립미술관의 벽면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미술관에.
그러나 그 나라 국민들은 이 그림 앞에서 숙연해 집니다. 눈물을 보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저 여인은 노인의 딸입니다. 검은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인의 아버지입니다. 그림의 주민인 키몬은 푸예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자입니다. 노인이지만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의미 있는 운동에 참여했다가 국왕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갖히게 됩니다.
국왕은 그를 교수형에 명하고 교수될 때까지 아무런 음식도 갖다주지 않은 형벌을 내렸습니다.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습니다.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은 딸은 해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거운 몸으로 감옥으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아버지를 본 순간 물 한모금도 못 먹고 눈은 켐한 모습에 힘없이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습니다.
굶어 돌아가시는 아버지 앞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 입에 물렸습니다. 이 노인과 여인의 그림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입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그림을 놓고 어떤 사람은 '포르노'라고 비하하기도 하고, '성화'라고 격찬하기도 합니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지 않지만 그러나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남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알면 시각이 확 바뀔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과 진실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남에게 속는 것보다 더 힘들고 무서운 것은 자신의 무지에 속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속지 말고 귀에 속지 말며 생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문득 이 그림이 주는 교훈이 가슴을 후비며 누군가에게 전해졌음 하는 작은 바람도 가져봅니다. 지식· 학식도 사람 사는 이치도 사리 판단도 예의범절도 아는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순천 예술테마파크 미술관 해설의 글 -
< 2 >
정숭주(1940~ , 前 전남대학교 예술대학장), 오작교(1999)
장애물이 있어 사진을 정면에서 찍지 못했다. 전시된 많은 그림들 중에서 내 마음에 와 닿는 그림이 있었다. 그림의 제목이 오작교인 것은 그림을 감상한 후에 알았다. 제목을 알기 전에 느낌은 오작교가 암시하는 ‘기다림의 여인’, ‘이별과 부재(不在)의 여인’이 아니었다.
여인이 걷는 길은 꽃길이다. 그러나 과연 운명의 그 길이 진정한 꽃길일까? 설령 꽃길이라도 맨발로 걷고 있으니 아플 수도 있겠다. 마냥 달콤한 환희의 길만은 아닐 수 있겠다. 하지만 주변은 휘황(輝煌)하지 않고 은은한 빛이다. 요란하지 않고 순한 평온의 길. 그것은 자신의 순수함이 만들어낸 축복이다.
무엇보다 가슴에 손을 대고 다소곳이 머리 숙인 여인의 모습은 선하고 착해 보인다.
너무 착해서 애틋하다.
요즘 가을 햇볕이 따뜻하다. 봄에 심었던 상추나 고추, 가지 등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배추, 무가 자라고 있다. 정원의 잔디도 서서히 파란색이 옅어져가고 서리가 한 번 내리면 누런색으로 변할 것이다. 언제나 보는 모습이지만 그린(Green)색을 보아서 그런지 마음이 순해지는 느낌이다. 아침에 피아노 소리는 마음을 한결 깨끗하게 한다. 전원생활의 작은 기쁨이다.
(2019.10.25)
구름 한 점 없는 가을날
시골학교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식전행사에서 교장선생님께서 대회사를 시작하는데 아마 교무선생님이 써 준 원고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청명한 가을 날’로 적혀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교장선생님께서 원고 그대로 읽으려고 하다가 하늘을 한 번 쳐다보니 파란 가을 하늘에 구름 한 점이 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은 대회사 시작 첫머리를 읽으면서 ‘구름 한 점 있고! 맑고 청명한 가을 날’로 시작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너무도 순박한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이시다. 구름 한 점 없다고 한들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오전에 마을 뒷산에 잠깐 올랐는데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가을날이었다.
(201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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