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소주 오르골

송담(松潭) 2019. 8. 13. 01:34

 

소주 오르골

 

 

 

 

 술에는 맛도 있고 향도 있지만 소리도 있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술이 내는 소리까지도 사랑한다. 캐럴라인 냅이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이라는 책에서 와인 병에서 코르크가 뽑히는 소리, 술을 따를 때 찰랑거리는 소리,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처럼.

 

 소맥을 말 때 순가락으로 유리잔의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는 유난스러워서 싫지만, 젓가락으로 아랫술을 윗술 쪽으로 휘젓는 소리는 좋다. 샴페인 뚜껑이 평 하고 날아가는 소리는 무서워서 싫지만, 잔에 따라진 샴페인에서 기포가 보글대며 힘차게 움직이는 소리는 좋다. 축구를 하고 난 후 목이 탄 축구팀 언니들이 여기저기서 다급하게 맥주 캔 따는 소리는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고, 단숨에 들이켜지는 맥주가 목울대를 넘어가는 소리는 그렇게 호쾌할 수가 없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다.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이 청아한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까지 맑아진다. 오직 새로운 병의 첫 잔을 따를 때만 나는 소리라는 점에서 애달픈 구석도 있다.

 

 먼저 한 병을 따서 첫 잔을 따랐다. 다른 병을 따서 또 첫 잔을 따랐다. 똘똘똘똘 소리가 두 번 연속 스쳐 갔다. 나는 잔을 얼른 비운 다음 나의 소주병A의 술을 친구의 소주병B에 부어 원래대로 채워넣었다. 그렇게 꽉 채워진 소주병B를 기울여 나의 잔에 따랐고...

 

 똘똘똘똘똘똘똘똘.

 

 났다! 소리가. 소리가 났다! 이렇게 '만들어낸'소리는 또 왜 이리 유난히 아름다운지. 소나기 아래서 빗물을 빨아들이는 나무의 요정 같은 소리가 테이블 위로 잔잔히 퍼졌다. 나는 신약 발견에 성공한 과학자처럼 소주병을 데이블에 놓자마자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승리의 만세를 불렀고,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좋겠네"). 이게 뭐라고 진작 해보지 않았담. 역시 똘똘똘똘 소리는 가느다란 병목을 빠르게 빠져나가려는 소수와 두꺼운 몸체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려는 소수의 속도 차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병목까지 채워가며 마시는 한, 소주 한 병을 마시는 내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브라보! 브라보, 병목현상!

 

 

< 2 >

 

 손에서 술잔이 떨어질 틈 없는 신나는 오후를 보내고 저녁 무렵에는 갑판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 앉아서 온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을 맞으며 해가 바다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하염없이 벨루가 보드카(철갑상어의 한 종류인 '벨루가'에서 이름을 따온 러시아의 보드카)를 홀짝홀짝 마셨다. 언젠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보면서 추운 날에 마시는 독한 보드카 한 모금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마침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모금 넘기면 목에서부터 몸속까지 타는 듯이 뜨거운 길을 내며 내려오다가 사라지는 보드카와 불타면서 떨어져 내리다가 사라지는 유성은 그 속도마저도 비슷한 것 같았다. 황홀감이 밀려드는 속도도.

 

 엷은 취기가 몸 전체에 번지는 동안 하늘과 바다 위로 밤이 찾아왔다. 바다는 검은 유약을 바른 도기처럼 빛났고, 하늘은 누군가 허공으로 내던진 목걸이가 구름에 부딪히며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사방으로 흩어진 보석 알 같은 별들로 빛났다. 좀처럼 떨어져 내릴 것 같지 않은 단단한 별들을 보면서 홀짝홀짝 몸속으로 별 몇 모금을 더 떨어뜨려 넣고는, 뜨거워진 몸과 마음으로 여기저기 머무를 수 있는 곳마다 잠깐씩 멈춰 서서 춤을 추며 방으로 돌아왔다.

 

 

< 3 >

 

술 규칙

 

 

 나보다 한 해 빨리 삼십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T는 건강에 조금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둘이 술 마시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데 아파서 술 못 마시는 일이 생기면 억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건강에 신경을 쓰는 거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를 이유다. 어쨌든 신경을 안 쓰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재작년부터 가급적 평일에는 마시지 말 것, 마시더라도 새벽 1시 전에는 끝낼 것, 마시더라도 (1인당) 소주 한 병/맥주 세 병/와인 한 병/위스키나 보드카 넉 잔을 넘기지 말 것(/ 표시는 'or'이다. 'and'가 아니니 착오 없길 바란다) 마시더라도 괜찮은 안주를 곁들여 마실 것, 이라는 규칙을 정했다. 건강에 신경을 쓰는 거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를 규칙이다. 게다가 '마시더라도'에 해당하는 상황이 지나치게 세분화되었다는 점에서 결국 마시게 될 거라는 패배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가급적'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편리한 말인지. '하지 말라'는 말을 꾸며주는 척하지만 슬그머니 '해도 된다'의 편도 들어주니 말이다. 어쨌든 규칙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다.

 

 나름 규칙을 잘 지키고 있지만('나름'이라는 단어 역시 얼마나 편리한 말인지), 위태위태한 순간들은 있기 마련이다. 규칙이고 건강이고 내일 출근이고 뭐고 너무나 맹렬하게 마시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둘 다 태생이 '가급적' 같은 인간들이다. 한쪽이 그래도 오늘은 좀 마시자'고 말하면, 안 된다고 엄격하게 선 굿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그림 그럴까?' 쪽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글러먹었다.

 

 마음을 흔들어놓는 영화나 공연을 보고 나온 직후라면 특히 그렇다. 흔들 때마다 모양이 바뀌는 만화경처럼 무언가 마음을 흔들 때야말로 평소 잠잠히 있던 여러 감정과 기억들이 활발히 움직이며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다양한 무늬의 생각들을 펼쳐 보이기 때문에, 이 화려한 관념들의 파티에 술이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컨택트>를 본 날도 그랬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와서 술을 안 마신다고? 정말? 이렇게 할 말이 많은 영화인데?

 

 우리는 잠시 후 편의점에서 사 들고 나온 무기, 팩 소주를 하나씩 손에 들고 걷기 시작했다. 가방 속에 여분으로 두 팩 더 챙겨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기가 떨어지면 안 되니까. 본디의 운명대로라면 바나나우유를 실어 날랐을 가련한 빨대를 타고 입안으로 소주가 들어오는 순간, 영화의 마지막에서 루이스가 이안의 품에 안기며 "당신 품이 이렇게 따뜻한 줄 잊고 있었다"고 말하듯이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아아, 팩 소주에 이런 맛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는 확실한 끝점과 '걷는 동안'이라는 화실한 단서가 붙으니 술과 흥에 겨워 1시 이후의 시간을 엄청난 사채를 내고 끌어다 쓰지 않을 자신까지 붙어 더 기분이 좋았다. 역시 걷는 것은 최고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행위와 술 마시는 행위 사이의 이 미묘한 균형. 규칙과 욕망 사이의 이 미묘한 균형. 한없이 느려지는 걸음으로 느적느적 걸으면서 우리는 영화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시고, 팩 소주를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고, 동네의 밤풍경을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고, 웃음을 터뜨리다가, 터뜨리다가, 또 터뜨렸다네.

 

 이날 이후로 우리는 아주 가끔씩 '걷술'을 즐긴다. 소요주파가 된 것이다. 다른 동네로 이사하고 나서도 영화관과 집까지가 마침 지하철역 두 정거장거리여서 몇 달 전에도 <서치>를 보고 나서 엄청나게 마시고 싶은 걸 걷술로 달랬다. 가을 휴가로 속초에서 일주일 지낼 때도 하루는 노을이 내려앉은 영랑호 한 바퀴를 걸으며 걷술을 마셨다. 요즘은 기분에 따라 팩 소주와 포켓 소주 중에 하나를 골라서 마시거나, 친구 웅이 출장 다녀오면서 끝내주게 멋진 포켓 술통을 선물한 뒤로는 좀 더 다양한 종류의 걷술을 마시기도 했다. 뭐가 됐든 걸으면서 마시는 술에는 특별한 맛이 있다. 규칙을 잘 지키고 있는 게 맞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는 테드 창의 원작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이번에 추가로 밑줄 친 부분은 루이스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는 마지막 단락이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이건 바로 내가 술집에 들어갈 때마다 겪는 딜레마다. 특히 음주를 시작하기 애매하디애매한 함정 같은 시간에, 환희의 극치일까, 고통의 극치일까. 가는 기차는 천국행이고 돌아오는 기차는 지옥행일 이상한 왕복 기차권을 끊을지 말지, 그냥 얌전히(?) 걸을지 오늘도 목하 고민 중이다.

 

< 4 >

 

이상한 술 다짐

   

 가을이 와버렸다. 1년 중 가장 술맛이 도는 계절, 퇴근길마다 부는 선선한 바람과 걷기 좋은 날씨가 발걸음을 번번이 술집으로 이끄는 계절. 그래서 요즘 매일 퇴근길마다 싸운다. 아쉬탕가 요가를 하러 갈까. 술을 마시러 갈까.

 

 지난주는 요가의 완패이자 나의 완패였다. 전어회가 제철이라, 막장과 마늘을 살짝 올린 기름진 전어에 소주를 마시느라고 흰자는 튀기듯이 바삭하게 노른자는 톡 치면 홀러내리게 익힌 달걀프라이를 얹은 김치볶음밥에 소주를 마시느라고,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날 으슬으슬한 게 오뎅 바가 제격이라, 무가 적당히 우려진 국물에 담겨 푹 익기 직전의 오뎅 꼬치를 쏙쏙 빼어 먹으며 온사케를 마시느라고......

 

 이게 지난주의 전적이다. 주말에 마신 와인은 쓰지 않겠다. 사이사이 마신 맥주는 아예 써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지지난주라고 뭐가 달랐을까? 답하지 않겠다...

 

 솔직히 이번 주도 완패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오늘은 요가가 술을 이겼다. 무려 홍어회를 이겨내고 요가를 다녀온 것이다! 갑자기 강철 의지력이 생겨났을 리는 없고 어제 이미 질릴 정도로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역시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 밖에 없다.

 

 앞으로도 퇴근길마다 뻗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안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

 

 

< 5 >

 

 그 석달 동안 수십 번 들었다 놓았던 고가의 와인을 '우아, 마침 세일까지 해서 한국 가격의 반이네, !' '한 달 동안 한 끼만 먹고 버틴 보람이 있었어!'라며 신나서 사 들고 들어온 날이었다. 와인은 첫 모금을 마시자마자 대체 이 고마운 와이너리는 어디에 있는 건지 구글맵을 찾아봤을 정도로 훌륭했다. 지나치게 훌륭해서 와인이 몇 번 더 혀를 황홀하게 휘감고 지나간 후 나는 처음으로 두려움에 휘감길 정도였다. 잠깐, 이대로 팬찮을까?

 

 주변 와인 마니아들에게서 수없이 들어왔던, 와인에 잘못 빠지면 집안 살림 거덜 난다는 말이 갑자기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다. 그랬다. 이건 단지 비싼 와인을 한 번 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혀의 감각이 쑥쑥 커지는 속도를 현실이 쫓아가지 못할 미래의 문제였다. 이미 웬만한 와인에는 예전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혀를, 만족의 허들이 높아져갈 혀를. 내가 앞으로 계속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올해 뿌린 포도씨가 와인이 되기도 전에 망할 거야. '세치 혀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말에 관한 경고인 줄만 알았지, 미각에 대한 경고가 될 수도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취향의 확장과 감당의 깜냥에 관해 생각했다. 그동안 돈이 많이 나가는 취미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던 데다가, 취향이라는 것은 경험, 사유, 지식, 능력, 근육량과 함께 확장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나에게는 새로운 종류의 고민이었다.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 취향의 세계에서 지속적 만족을 얻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지속적 만족이 불가능하다면 그 반작용으로 생길 지속적 결핍감에 대처할 수 있는가. 취향 확장비(혹은 유지비)를 나의 노동력과 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가. 취향 확장비로 얻을 수 있는 다른 것들과 비교했을 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게 확실한가.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너는 취항의 확장을 감당할 깜냥이 되는가!

 

 취향의 확장과 함께 넓어지는 세계. 멋진 말이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그게 와인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과 소중한 기억들을 안겨줄 테고, 그건 분명 멋진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멋짐을 마음 편히 누릴 수 있는 사람에 나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대개의 취향은 돈을 먹고 자란다. 그 때문에 어떤 취향의 세계가 막 넓어지려는 순간 그 초입에 잠시 멈춰 서서 넓어질 평수를 계산하고 예산을 미리 짜보지 않고서는 성큼 걸어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확장공사 다 해놨는데 잔금 치를 돈이 없으면 그때 가서는 어떡해? 그 돈으로 다른 좋은걸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깊이 고민한 끝에 나는 초입에서 돌아 나오기로 결정했다. 계속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아마 이런 게 흔히들 말하는 ''이라는 거겠지. 나는 통이 크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나의 깜냥인데. 무작정 걸어 들어가고 보는 여행은 마음이 편하지도 즐겁지도 못할 게 분명한데, "젊어서 여행은 빚을 내서라도 하라" 같은 말을 들으면, 그리고 실제로 빚을 내서라도 여행을 다녀오는 유의 사람을 만나면 마음 한편에 설렘과 모험심과 동경이 가득 차오르지만, 막상 나보고 하라고 한다면 빚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서 죽어도 여행을 즐기지 못할 게 뻔한 나의 깜냥을 이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짧고 굵었던 와인 대탐험은, 살다 보면 이제 막 움트려는 새로운 세계를 확장하는 대신 축소해야 하는 순간 또한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막을 내렸다. 나의 미뢰들은 '대체 석 달간의 그건 뭐였지. ?' 하고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다시 둔한 감각 속으로 숨어들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와인에 관해서 무취향에 가깝다. 달지 않고 드라이하면 다 좋다. 덤으로 아주 가끔 돈과 이상이 부딪힐 때 '내가 그때 와인에 계속 빠졌으면 어차피 없었을 돈이니까 이 정도는 쓰지 뭐!'라고 갖다 붙일 호기로운 핑계까지 생겼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여러모로 참 잘한 일 같다.

 

 혹시 나처럼 현실적인 여건이 여의치 않고 통이 크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어떤 세계를 피워보지도 못하고 축소해버리고 마는 것에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만큼은 꼭 말해주고 싶다. 살면서 그런 축소와 확장의 갈림길에 몇 번이고 놓이다보니, 축소가 꼭 확장의 반대말만은 아닌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되었다. 때로는 한 세계의 축소가 다른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확장이 돌발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축소해야 할 세계와 대비를 이뤄 확장해야 할 세계가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게는 '모자란 한 잔'보다 '모자란 하루'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든지, 그래서 모자란 한 잔을 얻기 위해 쓸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모자란 하루들을 늘려가는 데 잘 쓰게 되었다든지, 같은 여러 가능성. 아니, 뭐 그렇게 안 이어지면 또 어떤가.

 

 그러니 작은 통 속에서 살아가는 동료들이여, 지금 당장 감당할 수 없다면 때로는 나의 세계를 좀 줄이는 것도 괜찮다. 축소해도 괜찮다. 세상은 우리에게 세계를 확장하라고, 기꺼이 모험에 몸을 던지라고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지만 감당의 몫을 책임져주지는 않으니까. 감당의 깜냥은 각자 다르니까. 빛내서 하는 여행이 모두에게 다 좋으란 법은 없으니까.

 

 김혼비 / ‘아무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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