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어머니의 편지

송담(松潭) 2019. 5. 26. 19:35

 

어머니의 편지

-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 임 태주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 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깨꽃은 얼마나 이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밭이랑에서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도량이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 끓였고.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 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지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거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 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괞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임태주 산문 어머니의 편지 요약 옮김 )

 

출처 : http://blog.daum.net/d424902f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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