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송담(松潭) 2019. 6. 22. 12:02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내가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뒤인 196812, 인류는 처음으로 달 궤도를 돌았다. 아폴로 8호였다. 당시에는 대단했지만 다음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거기로 옮겨가버렸다. 그러나 아폴로 8호의 세 명의 승무원들은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을 목격한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지구라는 행성이 달 표면에서 떠오르는 장면을 처음으로 촬영하기도 했다. 달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해 네 바퀴째를 돌고 있을 때, 이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행성이 달 표면에서 떠오르는 모습을 목격하고 셔터를 눌렀다. 마침 크리스마스이브였고, 그것은 지구에 남겨진 다른 인류에게 보내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선물이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그러나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이었던 이 이미지 속에서 지구는 우주의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떠 있는 작고 외로운 푸른 구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작은 구슬이 그들이 살아서 돌아가야 할 곳이었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남겨져 있는 우주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아폴로 8호가 달 궤도에 진입한 다음날인 크리스마스에 발행된 뉴욕타임스에 '저 끝없는 고요 속에 떠 있는 작고,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지구의 승객 riders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 인류가 지구의 승객이라는 비유는 지금으로서는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당시에는 읽자마자 무릎을 칠 만한 것이었다. 승객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왔다가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매클리시는 이어서 우주의 이 끝 모를 차가움 속에서 우리 자신들은 형제 brothers, 서로가 형제임을 진실로 아는 형제라고 부연했다. 지구가 고작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구슬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시인은 자존심을 다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에 지구라는 작은 행성, 푸르게 빛나는 우주의 오아시스와 우리 서로를, 모든 동식물을, 같은 행성에 탑승한 승객이자 동료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암시한 것이다.

 

 인생을 여행으로, 인간을 여행자로 비유한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시인과 가객들이 그렇게 노래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최희준의 <하숙생>이 있을 것이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행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신생아는 자기가 도착한 나라의 말을 모른다. 부모와 친척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몇 년을 도와야 비로소 기초적인 언어를 익힐 수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여행자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갈 때, 남아있는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환송한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문명은, 마치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를 배웅하듯이 망자를 대한다. 관 속에 노잣돈이나 길동무 인형을 넣어준다. 철저한 무신론자조차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면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낮선 이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을 제공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 거의 모든 문명에, 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계율들이 남아 있다.

 

 이런 환대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언젠가 읽은 여행기에서 나는 답을 발견했다. 저자는 북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그제야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황하는 그녀 대신 현지인 할머니가 버스요금을 내주었다. 나중에 갚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에게 갚을 필요 없다.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과 그 푸른 구슬에서 시인이 바로 인류애를 떠올린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승객인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서로에게 보여준 신뢰와 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노바디의 여행

 

  <1>

 스물다섯에 떠난 유럽 배낭여행. 어느 날 밤, 나는 파리 북역 바닥에 앉아 밤늦게 도착할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둘기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고 역사는 썰렁했다. 배낭여행자들이 삼삼오오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가운데 술 또는 마약에 취한 노숙자들이 비틀거리며 그 사이를 오갔다. 저녁을 먹은 지 이미 오래여서 배는 고팠고, 어서 기차가 도착해 따뜻한 객실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두 명의 젊은 백인 여성 백패커가 다가왔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유럽을 장기여행 중이라고 했다. 날더러 어디를 가느냐고 묻고, 내가 암스테르담으로 간다고 하고 자신들도 거기로 간다고 하면서, 그럼 자기들과 같이 여행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왔다. 유럽의 밤기차는 컴파트먼트 구조로 되어 있어서 낮에는 양쪽에 세 명씩 여섯 명까지 마주 보며 앉아서 가지만 밤에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 간이침대처럼 만든 후, 세 명까지 누워서 갈 수 있었다. 그들 제안은 날더러 자신들과 한 컴파트먼트에서 같이 자면서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자고 했고, 기차는 곧 도착했다. 우리는 이등칸의 컴파트먼트를 하나 차지하고 짐을 선반에 올린 후, 의자를 조정해 평평하게 만들었다. 창가 쪽에 둘이 차례로 자리를 잡고 내가 복도 쪽에 누웠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였겠지만 그들은 내가 떠나온 나라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한국인은 주로 쌀을 먹느냐, 빵을 먹느냐. 언어는 중국어를 쓰느냐, 일본어를 쓰느냐 같은 걸 물었고, 나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다 그들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들이 날 선택한 것은 나 개인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한 컴파트먼트에서 밤새 같이 있기에 가장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서구에서 동아시아남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을 그대로 따른 것뿐이었다. 지금도 미국 영화나 TV드라마를 보면 그런 스테레오타입이 여전히 반복 재생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과하게 예의바르거나(주로 일본인들), 부모의 열렬한 교육열에 힘입어 공부만 죽어라고 하고 운동 같은 것은 젬병인 공부 벌레(한국인이나 중국인)인데, 언어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백인 여성을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은 그냥 그들만의 세상에서 소심하게 제 할 일만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암스테르담 기차의 컴파트먼트에서 나는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역할을 그대로 했다. 숨쉬는 마네킹이 되었던 것이다. 간간이 빈자리를 찾는 승객들이 컴파트먼트 문을 열었다가 세 명이 모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문을 닫았다. 내가 문을 지키고 있었기에 두 여자는 안쪽에서 편안히 누워 갈 수 있었다. 밤새 아무도 우리 컴파트먼트로 들어오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우리는 밝게 웃으며 헤어졌다. 그들은 한국인이 쌀을 주식으로 한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내가 백인 여성들이 아무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신들 옆에 재울 수 있는 존재로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인 것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달랐다. 젊은 날의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의 인종이나 국적에따라 '특별하게' 분류되고, 일단 분류된 이후에는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경험은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 특별한 존재 Somebody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 nobody 일 뿐이다.

 

  <2>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긴 여행의 초반에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와 얽힌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오디세우스는 운이 나빠서 키클롭스에게 봉변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어떤 무인도에 상륙하게 된다. '키클롭스들의 나라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 섬에는 야생 염소들이 수없이 많이 살고 있다. 키클롭스들은 배가 없어서 바다를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안전하다. 배를 댈 안전한 포구도 있고, 샘물도 솟아나며, 포도나무도 있었다. 철따라 나지 않는 것이 없는 섬. 그들은 거기서 그저 순풍이 불기만 기다리면 되는 터였다.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그날 해가 질 때까지 온종일 그곳에 앉아 말할 수 없이 많은 고기와 달콤한 술로 잔치를 벌였'.

 

 그런데 하룻밤을 잘 자고 일어난 오디세우스는 갑자기 키클롭스들이 살고 있는 섬으로 가보겠다고 선언한다. 그래야할 현실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키클롭스들이 어떤 자들인지,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며 무도한 자들인지, 아니면 손님을 환대하고 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인지를 알아보겠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한 척의 배만 끌고 키클롭스의 섬에 상륙한다.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주인이 없는 동굴에 들어가 키클롭스가 키우고 있는 양과 염소, 치즈와 유장 등을 발견한다. 부하들은 새끼 염소와 새끼 양, 치즈만 가지고 어서 배로 돌아가자고 간곡히 애원하지만 오디세우스는 물리친다. 그는 키클롭스가 '내게 선물을 주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는 남의 집에서 불을 피워 제물을 바치고(양이나 염소를 잡아 구워 먹었다는 뜻) 치즈를 가져다 먹는다. 그러니까 오디세우스는 멀쩡히 잘살고 있는 키클롭스의 땅으로 들어가 마치 도적처럼 그의 집이라 할 수 있는 동굴을 '습격'해서 그 음식과 재산을 약탈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감생심 키클롭스가 자신에게 줄 선물까지 기대하고 있다. 도대체 오디세우스는 뭘 믿고 이런 어이없는 기대를 했을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거처로 돌아와 불을 피우던 키클롭스는 오디세우스 일행을 발견하자 당장 이렇게 묻는다. "너희들은 누구인가? 어디로부터 물길을 따라 흘러왔느냐? 무역을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해적들처럼 목숨을 걸고 파도를 타고 다니며 약탈을 일삼는 자들인가?" 장사꾼이라면 거래를 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바다를 떠도는 도적떼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래도 그렇지 키클롭스에게 해적이냐는 힐난을 받은 트로이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장사꾼 아니면 해적이라니! 발끈한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며 제우스신과 아가멤논을 들먹인다. 자신은 트로이에서 오는 길이며 바다를 헤매고 있는데, 이것도 아마 제우스의 뜻이고 계획일 것이다. 또한 자신은 명성이 하늘 아래 가장 큰 아가멤논의 백성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아가멤논의 명성은 '큰 도시들을 함락했고 많은 백성들을 죽'여서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은 트로이전쟁의 승자인 아가멤논의 백성이고, 또한 제우스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어서 자신을 알아보고 대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클롭스는 코웃음을 치고 바로 그들 중 두 명을 '마치 강아지처럼 움켜쥐더니 땅바닥에 내리'친 다음 '토막 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산속에 사는 사자처럼 내장이며 고기며 골수가 들어 있는 뼈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것으로 대답한다.

 

 오디세우스가 위험을 자초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호메로스의 서술에 따르면 그것은 오디세우스의 허영과 자만심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키클롭스의 동굴을 제 발로 찾아간다. 원래 당도했던 섬에도 부족한 것은 없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키클롭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난공불락의 트로이가 누구 덕에 함락되었는지 알아? 용맹한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바로 나, 트로이 목마를 고안한 영리하고 꾀 많은 오디세우스님 덕분이다.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는 무인도에 도착했지만 오디세우스의 마음은 어딘가 허전했던 것이다. 말 못하는 염소떼 뿐이었던 것. 배가 채워지자 그의 마음속에 다른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인정의 욕구. 낯선 땅에 사는 존재로부터 찬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고향 이타케에서는 왕이었고, 트로이에선 영웅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언제나 섬바디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측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바다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나뭇잎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의 자아는 쪼그라들었다.

 

 어렸을 때는 이런 대목을 보지 못했다. 그냥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키클롭스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쯤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오디세우스가 어떻게 이런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는가를 노래하고 있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여행자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여행지에서는 그저 이런저런 범주에 따라 분류될 뿐이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고향에서 받는 대접을 요구하고픈 유혹을 느꼈고 실제로 실행에도 옮긴다. 그러나 원하던 것을 얻기는 쉽지 않다. 현지인들은 여행자에게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은 곧 떠날 것이며 잊혀질 것이다. 오히려 여행자에게 너무 큰 관심을 갖는 현지인이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갖고있다는 뜻이고, 그 필요가 너무 절박하면 그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강탈하려 할 것이다. 이른바 '예의바른 무관심' 정도가 현지인과 여행자 사이에는 적당하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굳이 갈 필요가 없는 위험한 곳으로 가서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의 음식에 손을 댔으며, 주인이 돌아온 후에도 사과는커녕 융숭한 대접과 선물을 요구했다. 그의 행동은 분명 과했지만 그 마음까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오히려 여행을 떠나면 특별한 뭔가가 되는 느낌이었는데 작가로 자리를 잡고 난 뒤에는 그 반대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데, 해외에 나가면 내가 누구인지를 나만 아는 것 같았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기만 아는 상태가 지속되면 키클롭스의 섬으로 쳐들어가는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심리 상태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김영하 / ‘여행의 이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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