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필요한 지식을 묻다
1422년(세종 4년) 1월 1일, 일식을 앞두고 세종은 소복을 입은 채로 의식을 치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 현상이 곧 나타날 예정인데, 당시 일식은 사회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현상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 일식으로 인한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의식을 거행했지요. 그런데 일식 예보를 맡았던 담당관 이천봉이 예보했던 시간보다 일식이 15분가량 늦게 나타납니다. 세종은 인정전 앞에 서서 계속 기다렸겠지요. 이 일로 이천봉은 의식이 끝나고 나서 곤장을 맞습니다.
세종은 말합니다. 조선의 절기와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기준으로 천문계산을 다시 해야 한다고요. 1433년에 세종은 이순지와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에게 중국의 이론을 정리해 조선에 맞는 천문과 역법을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442년 마침내 조선과학사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인 『칠정산七政算』이 편찬됩니다.
칠정은 무슨 뜻일까요? ‘월화수목금토일’입니다. 수금화목토의 5개 행성과 태양과 달, 이렇게 7개의 별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칠정산』은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편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아라비아 천문학을 정리했고, 내편은 수시력과 대통력을 서울의 위도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내편은 1년을 365.2425일, 한 달을 29.530593일로 기록하는데, 이 숫자들은 현재의 값과 유효 숫자 여섯 자리까지 일치하는 정확한 것입니다.
『향약집성방』
병들면 반드시 중국의 얻기 어려운 약을 구하니
다만 옛날부터 의학이 발달되지 못하여 약을 시기에 맞추어 채취하지 못하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고 먼 것을 구하고 사람이 병들면 반드시 중국의 얻기 어려운 약을 구하니, 이는 7년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약은 구하지 못하고 병은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세종실록60권, 세종 15년 6월 11일
세종 15년에 출판된『향약집성방』의 서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당시는 조선의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 제때 약을 구하지못하고, 사람들이 병들면 조선의 땅에서 나는 약을 믿지 않고 중국의 약만을 찾는 상황이었습니다. 15세기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학자라면,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세종과 그의 신하들은 세 가지 일을 진행합니다.
먼저 중국 의학서적을 모아서 정리합니다. 『향약집성방』은 조선 태조 시기 만들어진 『향약제생집성방』의 2배가 넘는 150여 종의 의서를 참고도서로 인용하는 책이 됩니다. 두 번째는 '향약에 대한 것입니다. 향약은 조선 땅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만들어 진 당약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세종은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향약방에 대하여 여러 책에서 빠짐없이 찾아내고 종류를 나누고 더 보태어” 정리하도록 지시합니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약재의 전체 목록이 만들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향약과 당약을 비교해 확인합니다. 세종 5년인 1423년에는 62종의 향약을 검토했는데, 그중에 48종은 이미 향약과 당약이 일치한 상황이었고, 새롭게 일치하는 약 6종, 불일치하는 약 8종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불일치하는 8종의 약재 사용은 금지시킵니다.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 이 작업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의학지식을 담고 있는 중국의 의서를 모아 정리하고, 조선 땅에서 생산되고 사용되는 향약을 모아 정리합니다. 그리고 중국 의학서적에서 처방하는 당약과 향약이 일치하는지를 비교 검토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이 책을 기반으로 최신 지견에 따라 진단을 받고 조선의 땅에서 만들어진 약을 걱정 없이 처방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대 여러 역량의 한계 속에서 조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최선인가를 고민하고, 그 합리적인 개선 방안을 생각해내고 현실을 져나간 과정이 저는 놀랍습니다. 그래서 저는 『향약집성방』이 훌륭한 과학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람소리, 학의 울음 소리일지라도
모두 글로 적을 수 있을 것이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안케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서문의 첫 문장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세종이 어떤 작업을 거쳐 어떤 원리를 적용해 문자를 만들었는지 기술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天, 지地, 인人세 가지를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라 생각하고 사상적 기반 중 하나로 삼았습니다. 또한 성운학의 측면에서 기존의 이론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ㄱ을 '혀 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에서 따왔다고 설명하는 발음기관 상형론은 훈민정음의 독창적인 방법론입니다. 놀랍지요.
『칠정산』과 『향약집성방과 『훈민정음』은 모두 자랑스러운 조선 과학의 성과입니다. 『칠정산』은 중국의 천문역법을 이해하고 그 역법에 이 땅의 위치를 감안해 조선의 천문과 달력을 만든 성과이고 『향약집성방』은 중국의 의학서적을 모아 정리하고 그 서적의 처방에 해당하는 당악과 일치하는 향약을 정리해 낸 성과입니다. 둘 모두 중국의 과학을 조선의 땅과 사람에 맞추어 주체적으로 수용한 훌륭한 과학 서적입니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그러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자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낸 역작입니다.
예조판서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본』서문은 여러 차례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다가 만난 문장입니다.
쓰는 데마다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고 가는 데마다 닿지 않음이 없어,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글로
적을 수 있을 것이다.
바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적을 수 있는 문자로 후대의 사람들은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며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이들이 만들어놓은 성과 위에 서 있습니다.
김승섭 / ‘우리 몸이 세계라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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