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들러 리스트,
쉰들러보다 감명 준 건 역사를 대하는 독일의 자세
영화관계자들이 뽑은 1990년대 영화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쉰들러 리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유대인을 구출한 체코인 오스카 쉰들러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최근 오스카 쉰들러의 선행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나치의 잔인한 홀로코스트가 진행될 당시 학살 위기에 놓일 유대인을 구출했던 쉰들러의 행동은 유태인의 후손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 감동으로 다가왔고 영화로 제작되기에 이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군에 의해 점령당한 폴란드의 어느 마을. 영화 초반 오스카 쉰들러(리암 니슨 분)는 인도주의자가 아닌 시류에 맞춰 자신의 성공에만 관심 있는 기회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는 체코인임에도 유태인이 경영하고 있다가 나치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그릇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되고 독일군에게 뇌물을 바친다. 쉰들러가 유대인들을 자기 공장의 일꾼으로 기용한 것도, 순전히 폴란드인보다 저렴한 임금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성공과 부의 축적, 그리고 미모의 여인에만 관심 있던 호색한 쉰들러는 어느 날 말을 타고 마을 언덕으로 올라갔다가 나치에 의해 학대당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고 큰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그가 고용한 유대인 회계사 스턴(벤 킹슬리 분)에 의해 유대인 학살의 참혹한 현실을 인식하게 된 쉰들러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유대인 노동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나치 장교들에게 뇌물을 주는 형식으로 1000명이 넘은 유대인들을 살린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된 유대인들과 달리, 나치 당원이자 나치에 협력한 전범 쉰들러는 도망자 신분이 된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준 쉰들러를 잊지 않은 유대인들은 쉰들러가 죽은 이후 그의 묘비를 만들어주었고, 지금도 쉰들러의 무덤을 찾는 유대인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제66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고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던 <쉰들러 리스트>는 작품 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만행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대하는 독일인의 자세다. 독일인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참혹한 역사일 것이다.
하지만 과오를 철저히 반성하고, 지금도 철저한 역사 교육을 통해 '나치'를 스스로 경계하는 독일이라는 나라는 <쉰들러 리스트>를 두고 유대인 학살을 공론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고, 1998년 독일 대통령의 이름으로 스필버그 감독에게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독일 최고의 명예인-십자훈장을 수여한다.
조상의 만행을 널리 알렸다고 유대계 미국인 감독에게 훈장까지 주는 독일. 비슷한 시기 비슷한 아픔을 겪었지만 해당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그들의 철저한 역사 인식과 반성의 자세가 감명 깊게 다가온다.
출전 : 미디어스(너돌양의 세상전망대)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연합군의 승리로 쉰들러가 피신하게 되자, 1100명은 감사의 표시로 반지를 만들어 선물로 줍니다.
유태인들은 이 반지에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는
탈무드의 문구를 새겼습니다.
이 반지를 받아들고 쉰들러는 눈물을 글썽이며 “더 살릴 수도 있었는데...”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동차를 만지면서 “이 차, 왜 팔지 않았을까? 열 명은 구했을텐데! 열 명이나 말이야!”
나중에는 울면서 중얼거립니다. “더 구할 수 있었는데 내가 안한 거야! 안했다구!”
오스카 쉰들러
출생 | 1908년 4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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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나, 성적증명서 위조를 이유로 퇴학당했다. 1927년에는 쇤베르크의 오토바이 학교에 다녔으며, 이후 군대에 입대하여 18개월동안 복무하였다. 1927년에 부유한 농장 경영자인 요제프 펠츨의 딸인 에밀리 펠츨을 만났고 이듬해 결혼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독일 국방군 첩보부와 관계를 맺은 뒤 첩보원으로 활동하다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주데텐란트 합병으로 인해 사형은 면할 수 있었다. 1939년에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한 유대계 폴란드인 사업가의 조언을 받고 활발한 사업 활동을 시작했으며, 나치에 의해 탄압받던 또다른 대상인 폴란드인들을 대규모로 고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수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했으나, 전쟁 후에는 이때의 막대한 지출이 사업 실패로 이어지게 된다.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을 받고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독일에 거주하면서도 이스라엘에서도 거주하게 된다. 1974년에 사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서예루살렘에 안장되었다. 1993년에 미국의 영화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인 《쉰들러 리스트》는 그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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