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 전시회를 보고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많은 축하 행사와 공연으로 떠들썩하지만, 왠지 허탈하고 감동하지 못하는 건 아직도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의 아픔 때문이리라. 때맞춰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는 천재 월북 화가 「이쾌대 50주기」는 우리에게 지금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게 한다.
백남준과 함께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는 이쾌대가 남긴 그림은 대략 1930년에서 1950년 무렵까지 20여 년에 걸쳐 제작되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기로 한국 역사의 비극적 시대와 겹쳐지는데 그는 바로 이 암울한 시대를 딛고 예술혼을 꽃피운 화가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월북 이후부터 타계 때까지 북한에서 활동한 흔적과 작품은 접할 수 없었다. 휘문고보 시절 그린 첫 작품 수채화 「정물」, 1938년 제25회 일본 니카카이 미술전람회의 입선작으로 그의 이름을 알린 작품 「운명」, 국전 출품작 「추과」를 포함하여 다양한 인물화, 군상 시리즈의 대작 등 40여 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100점 넘는 미공개 소묘와 각종 편지, 엽서, 발표 글과 화집, 유품 등 다양한 자료도 동시에 선보인다.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휘문고보 시절 야구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란 부모님이 야구 빼고 좋아하는 건 무엇이든지 하라고 했더니 뜻밖에 미술을 선택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때부터 뒷바라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양화가 장발을 담임교사로 만나면서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졸업 후 일본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김일성 초상을 그리는 부역 행위로 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수용소에서 생존을 위해 가족을 남긴 채 북녘 행을 택했다. 그는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이름조차 거론되는 것이 금기시되다 1988년 해금된 후에야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서양 중절모에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오른손에는 동양화 붓을, 왼손에는 팔레트를 들고 무언가 응시하는 듯한 표정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은 대표적인 걸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화가의 옷매무새나 그림 도구에서 동서양을 아우르며 우리의 전통을 고수하는 당당함이 풍긴다. 부인 유갑봉을 모델로 해서 그린 인물화 여러 점 중에서 「빨간 외투 입은 여인」의 작품 왼쪽 여백에 “나의 할 일은 이것, 어떤 장애물이 와도 오직 그 길뿐”이라는 글을 새겨 부인에 대한 사랑과 다짐을 보여준다.
(...생략...)
이쾌대,군상 lll,1948,캔버스에 유채,개인소장
월북 전 이중섭만큼이나 유명했던 이쾌대의 작품을 그나마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작고한 부인의 공이 크다고 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면 그림을 팔아서 자식을 돌보라는 남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점도 팔지않았다고 한다. 금기시되었던 작품들을 다락방에 꼭꼭 숨겨서 보관했으며 심지어 아들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니 작품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해금 뒤 1991년에 처음으로「군상」연작과 「자화상」, 「운명」」등이 개인전에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6.25 전쟁 중에는 어떻게 그 많은 작품을 남몰래 보관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월북 가족으로 수많은 세월을 숨죽이며 살았을 부인과 화가의 삶이 분단의 아픔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우리 전통문화를 화폭에 녹여내고 우리 민족이 겪었던 이야기를 작품을 통해 증언하고자 했던 이쾌대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남북 이산의 비극적 현실을 다시 한 번 통감했다. 남북한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서울과 평양에서 마음 놓고 그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그 날을 꿈꾸어본다. (2015.8.24.)
서옥경 / ‘키움 수필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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