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열정을 지나 흐르는 사랑의 시간

송담(松潭) 2019. 1. 29. 11:02

 

열정을 지나 흐르는 사랑의 시간

 

드디어 단골 미용실에 가서 머리 손질을 받았다. 머리카락이 잡초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 왠지 상큼한 아이디어도 안 떠오르고, 책도 잘 안 읽히는 것 같다. 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의욕이 나지 않는 날이 며칠 계속되면 공연히 죄 없는 머리카락을 원인으로 삼아버리곤 한다.

 

 파마약을 머리에 바르고 기다리는 동안 새로 나온 잡지를 뒤적거리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표제들이 있었다. ‘권태기 지혜롭게 넘어가는 비법’, ‘사막 같은 관계에 오아시스 만들기’,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주말여행등 여성잡지에 조미료처럼 매달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제목들이었다.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에게 필요한 처방의 글들인데 그다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새삼 솔깃해지는 것을 보니 아마 내게도 비슷한 증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증상은 내가 열정 한 톨 없이 무감각하게 살면서 영혼을 빈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열정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열정은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자신의 가장 매력적인 모습을 찾게 하는 것은 물론, 오감을 열어 풍부한 감수성으로 주변을 바라보게 한다. 또한 심장이 매일매일 힘차게 뛰고 있다는 것도 느끼게 하고 피가 온몸 구석구석까지 돌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게 만든다. 열정이야말로 지쳐 가는 일상에 희열을 안겨주는 축복이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평생 놓쳐버리지 않고 지켜내고 싶은 그 무엇이다.

 

 식지 않는 열정, 축복일까 형벌일까

 

 중세 말에 쓰인 단테의신곡에는 평생 떨어지지 않고 늘 붙어서 열정 속에 사는 연인이 등장한다.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표현주의자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바람의 신부라는 제목으로 이 연인들의 모습에 자신의 감정을 가득 실어 그렸다.

 

 지옥을 답사 중이던 단테는 거센 바람 속에 떠다니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 묻는다. “도대체 사랑이 무슨 죄가 되었기에 두 분은 이곳에 오셨습니까?" 그러자 아름다운 프란체스카가 자신들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지독한 추남에 성격마저 포학했던 파울로의 형 장치오토는 프란체스카와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잘생기고 부드러운 성격의 동생 파울로를 대신 내세웠다. 파울로를 형인 줄 알고 사랑하게 된 프란체스카는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야 파울로가 남편이 아님을 알고 무척 상심했다. 파울로 역시 처음에는 형을 위해 한 일이었지만 프란체스카를 만난 후부터는 연모의 정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다. 시선을 피하며 살던 두 사람은 어느 날 함께 책을 읽다가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서로의 숨결을 느꼈고, 끓어오르는 열정을 억누를 길 없어 정신없이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말았다. 때마침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된 장치오토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그 둘을 한칼에 베어버린다.

 

 불륜의 대가로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둘의 영혼은 이제 더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파울로는 프란체스카를 신부로 맞이했고, 둘은 처음으로 행복감에 젖었다. 게다가 지옥의 심판관은 이들 두 영혼에게 영원토록 열정적인사랑 속에서 살도록 형벌 아닌 형벌을 내려주기까지 했다.

 

 과연 그 형벌은 축복이었을까? 코코슈카는 청회색의 음울한 그림을 통해 영원한 열정이란 오히려 고통스러울 수 있다고 답하는 듯하다. 회오리바람 속에 몸을 내맡긴 두 연인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고 몹시 힘겨워 보인다.

 

 잔잔한 사랑이 선사하는 풍요로움

 

 사람들은 열정이 오래도록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기를 갈망하지만, 그 갈망은 거의 예외 없이 시간의 파괴력 앞에 무너지고 만다.

 

 열정을 품는다는 것은 말이 전력 질주하는 것과 같아서 숨도 가쁘고 에너지 소모량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고삐를 채우지 않은 채 변덕스럽게 질주하는 말처럼 사랑을 하면, 쓸 수 있는 내적 에너지가 한꺼번에 모두 소모된다. 그런 사랑은 서로를 상처 입히고 쇠진시키는 폭력적인 사랑이 되고만다는 것이다. 폭풍 후에는 잔잔한 하늘이 열리듯, 열정적인 사랑 후에는 잔잔한 사랑의 단계로 넘어간다. 여러 국면의 사랑들을 한 단계씩 차례로 경험하면서 자신과 상대방을 새롭게 재발견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꼭 열정이 아니어도 영혼은 풍요로울 수 있다.

 

 퇴근하고 온 남편은 둔하게도 내 헤어스타일이 바뀐 걸 눈치채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바뀐 머리가 무척 마음에 든다. 내일부터는 무슨 일을 해도 의욕이 샘솟을 것 같다.

 

 

한곳만 바라보는 숨 막히는 사랑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연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누구나 하나만 알고, 한곳만 바라볼 때가 있다. 사랑에 처음 빠진 남녀가 그렇고, 성공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도 그럴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연인을 보면, 주위를 전혀 볼 수 없이 얼굴을 베일로 덮은 채 서로가 오직 상대방만을 느끼려하는 연인의 모습이 나온다. 이 둘에게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고, 단 하나 자신 앞에 있는 연인만 존재할 뿐이다. 두 사람은 더없이 행복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숨이 막히는 듯 갑갑할지도 모르겠다. 화가는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일까. 행복일까 고통일까.

  

 사람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여러 개의 공간이 있고, 숨통을 틀 수 있는 창문이 있다. 여러 일로 힘들어 하면서도 그럭저럭 견디며 살 수 있는 것은 저쪽 생각으로 이쪽 생각을 잊고, 또 이쪽 생각으로 저쪽 생각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눈을 팔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키고 싶은 사랑을 위해, 숨 쉴 공간을 만들어놓자는 것이다.

 

 사람들은 방이 많은 집에 사는 것을 좋아하면서, 마음에는 방이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심장에는 좌심방. 좌심실, 우심방, 우심실 이라는 방들이 있지 않은가! 오직 한쪽만 바라보는 사람은 로맨틱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방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일 것이다. 심지어 그 방에는 마그리트가 그린 두 남녀처럼 바깥세상은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베일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세상 안에 놓여 있을 때,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때 상대적으로 유일함의 가치가 빛난다.

 

 이주은 / ‘그림에, 마음을 놓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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