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질투, 나의 아픔
어릴 적, 나는 명절 때 큰아버지 댁에만 다녀오면 한동안 우울하게 지냈다. 큰아버지 댁은 서울에서도 가장 학군이 좋다고 유명한 동네에 있는 방이 다섯 개, 화장실이 두 개 딸린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 식구는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사글세 단칸방에서 사는 신세이다 보니 그 격차는 실로 엄청나서 어린 나에게 큰아버지 댁은 문명이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일단 냄새부터가 달랐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 집과는 다른 오묘하고도 포근한 향기가 났다. 게다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신발장 옆에는 내가 평소에 가지고 놀고 싶었던 농구공, 배구공, 자전거 같은 것들로 가득했고, 거실에 들어서면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크고 편안한 소파와 유명 작가의 판화 작품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부러웠던 것은 내가 그렇게나 배우고 싶었지만 학원 갈 형편이 안 돼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피아노가 놓인 방이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넓은 공간을 아버지 바로 위의 형과 그의 가족이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항상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조차도 부족했던 시절의 나에겐 말이다.
큰아버지네는 사촌형과 사촌동생이 있었는데 몇 년간 외국 생활을 하고 와서 그런지 그들과 나 사이에는 큰 강이 놓인 듯했다. 사촌형은 그 강 건너편에 서 있을 뿐 나와 내 동생에게 손을 내밀어 이리 와서 함께하자는 제스처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집에 가서도 나는 항상 내 동생 하고만 놀다가 오곤 했다. 혹자는 내가 먼저 사촌형에게 살갑게 다가갈 수는 없었느냐고 묻겠지만 사실 없는 자가 있는 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땐 어렸고, 만나는 장소가 내 집도 아닌 큰집이었으니 주변인으로 맴돌다 알 수 없는 상실감만 안은 채 돌아오기 일쑤였다.
어른이 된 지금은 그렇게 없이 살았던 콤플렉스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져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 나에게 큰집이란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존재, 거대하고도 넘기 불가능한 존재, 부모님을 한참 동안 원망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공부를 곧잘 하는 편이었음에도 명절 때마다 내 학교 성적은 전교 1, 2등을 하는 사촌형에게 밀렸고,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순간들이 반복되어 깊은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열악한 가정환경 속에서 나 혼자 아무리 열심히 분투한다 해도 사촌들의 그 산은 영원히 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눈을 감으면 생생히 생각나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쯤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할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온 가족이 모였다. 가기 싫다는 내 손을 억지로 끌고 부모님은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큰집으로 갔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나를 고모들은 사촌들과 함께 놀라며 방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사촌동생과 말을 섞게 되었다. 사촌동생은 최근에 부모님께서 미국에서 사다 주셨다는 장난감 하나를 보여주었다. 사진기처럼 보이는 것이었는데, 컬러로 된 둥근 필름을 끼고 뷰파인더 안을 들여다보면 미국의 여러 국립공원 모습이 담긴 사진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촌은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허락해주었고 나는 한참 동안 내 동생에게 보여주고 설명해주며 가지고 놀았다. 그런데 한참을 보면서 놀다 보니 그 둥근 필름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리저리 만져보며 조정하는데 아뿔사, 이를 어쩐다. 그만 필름이 구겨지고 찢어진 것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 한참 고민하던 난 조용히 혼자 아파트 밖으로 나가 그 필름을 버렸다. 그러고는 필름이 없어진 걸 모르는 척 했다.
사촌동생은 당연히 그 필름이 어디 갔는지 나에게 물었다. 계속 물어도 내가 모른다고만 하니 큰어머니께 일렀고, 큰어머니는 내가 진짜 모르는 일인지 나와 내 동생에게 물어보셨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큰어머니에게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내 안에서 나도 모르는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서러움, 분노, 미움, 시기, 짜증, 억울함이 뒤섞인 정말로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한참동안 감정에 북받쳐 엉엉 울며 다시는 큰집에 가지 않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맹세했지만 다음 해에 또다시 부모님 손에 이끌려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아마 그때 나는 내게 없는 부분을 사촌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큰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어린 시절의 일화일 수도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사실 지금도 가슴이 저려 아파온다. 그 복잡했던 감정들을 ‘질투’라는 한 단어에 욱여넣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참 아프고 처참하게 만드는 감정임에는 틀림없다.
질투라는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질투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거나 나와 엄청 다른 사람이 아닌 대체로 나와 연관된 사람을 통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입사 동기의 승진을 질투하지 나와 인연 없는 빌 게이츠를 질투하지 않는다. 또한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나에게 없는 어떤 부분을 내가 아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 질투가 일어난다. 그 감정의 농도가 옅으면 단순한 부러움으로 그치지만, 진해질 경우 질투는 분노로, 강한 미움으로 심지어 폭력으로도 전이 된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상대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봤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 수 있다. 그 사람이 가진 재산이든 능력이든 외모든 내가 없는 그 일부분만을 바라보면 질투가 일어나지만 반대로 그 사람에겐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받는 남모르는 스트레스나 괴로움이 있을 수 있다. 즉 내가 없는 그 부분만을 바라보면 나보다 더 행복하고 더 잘난 존재인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사람의 전체를 바라보면 나와는 다른 양상의 고뇌와 불안이 있지 내가 상상한 것처럼 마냥 행복한 존재는 아니 라는 것이다.
질투라는 감정을 잘 활용하면 내 능력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하늘은 어떤 사람을 큰 능력의 소유자로 만들고 싶으면 그 사람보다 잘나 보이는 라이벌을 그에게 보낸다.’는 말이 있다. 질투의 에너지를 분노나 미움의 감정 안에 가둬두지 않고 나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활용하면 훗날 질투심을 유발했던 그 사람이 나의 가장 큰 은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 아이비리그에 가기위해 내가 그렇게 노력한 것도 어린 시절 사촌들과의 경쟁심에서 비롯한 것 같다. 내 공부를 위해 갔다고 생각했지만, 내 어린 마음은 그렇게라도 보란듯이 뭔가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질투의 힘이 없었더라면 그 당시 그렇게 나를 몰아세우며 공부하지 못했을 테다. 이제라도 사촌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어리고 가난한 과거의 나를 한번쯤 안아주고 싶다.
혜민 /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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