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죽은 뒤에야 명성을 얻은 비운의 천재
조르주 비제는 1838년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음악가 집안이었지요. 아버지는 성악 교사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비제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레슨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좋은 환경에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비제는 4세 무렵부터 피아노와 기초 화성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동시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카르멘>을 보고 단박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오페라에 얼마나 심취했던지 스무 번씩이나 관람했을 정도였지요. 그는 편지 형식으로 쓴 저서 '바그너의 경우'에서 <카르멘>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어제 비제의 걸작 〈카르멘>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 사랑의 본질을 이루는 비극적 장난이 그렇게 강렬하고 무시무시하게 표현된 경우를 본 작이 없습니다. (...) 사람들은 이제 바그너적인 축축한 북방과 작별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정신의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 역시 "비제의 오페라는 끝없이 몰아치는 바다의 파도처럼 나를 도취하게 했고 압도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카르멘>의 진가를 인상하고 니체가 이 작품을 예찬했을 때 비제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카르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채 요절했기 때문입니다 비저보다 더 짧은 생애를 산 작곡가는 슈베르트(31), 벨리니(34), 모차르트(35) 등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멘델스존과 쇼팽도 단명했지만 비제보다는 조금 더 오래 살았지요.
보석처럼 빛나는 지중해 오페라
비제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 유럽 오페라계는 독일의 바그너와 이탈리아의 베르디라는 거대 산맥으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두 거장에 의해 오페라라는 장르가 절정으로 무르익었던 시기였지요, 바그너는 자신이 창안한 악극을 통해 북구의 신화를 웅장하게 담아냈고,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인간적이고 역동적인 드라마를 펼쳐냈습니다. 그들의 오페라는 워낙 스케일이 크고 예술적 완성도도 높았기에 그 어떤 작곡가도 두 거장을 비집고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듯 보였습니다.
비제 역시 기세등등하던 두 거장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작곡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제는 고군분투한 끝에 <카르멘 > 한 펀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오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데 성공한 것이지요. 한 작곡가의 이름이 단 한 편의 작품으로 음악사에 길이 남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만큼 비제의 <카르멘>은 독보적인 작품이었고, 대중의 사랑도 많이 받았지요.
<카르멘>은 비제의 극음악적 재능의 집대성이자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 자체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극과 음악이 절묘하게 융합된 걸작이지요. 누군가는 〈카르멘>에 대해 “노래도 음악도 낭비가 없다"라고 말했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페라든 뮤지컬이든 음악극이라고 하면, 그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음악이 눈길을 끄는 것은 아니지요. 그 가운데 몇 곡만이 사랑을 받아 애장되거나 연주되는 행운을 누립니다. 그런데 <카르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음악이 문자 그대로 주옥같습니다. 전설적인 가수의 히트곡 모음집처럼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지요. 〈카르멘>이 콘서트용 모음곡으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어찌보면 무척 당연한 일입니다.
팜파탈의 전형, 카르멘
19세기 유럽 문학에 처음 등장한 팜파탈femme fatale은 ‘파멸로 이끄는 여인’, ‘치명적인 여인’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입니다. 주로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매혹적인 여성이라는 의미로 쓰이지요.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의 전쟁을 촉발시킨 헬레네,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로마를 잃게 만든 클레오파트라, 당나라의 현종을 몰락시킨 양귀비 등은 팜파탈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오페라에서 카르멘은 팜파탈답게 어리숙한 군인인 돈 호세를 노골적으로 유혹합니다. 사실 얌전한 돈 호세는 정숙하지 않은 카르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카르멘은 작정을 하고 얌전한 돈 호세를 건드립니다. 그녀는 ‘사랑은 자유로운 새처럼’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를 하바네라의 리듬에 실어 요염하게 부르지요. 이 유혹의 노래에 돈 호세는 마음이 흔들리고, 서서히 사랑에 눈이 멀면서 파멸의 나락에 빠지고 맙니다.
비제는 주인공 카르멘을 메조소프라노로 설정했습니다. 그때까지 오페라의 여자 주인공은 소프라노가 맡기 마련이었는데, 비제는 그 통념을 깨고 중저음의 메조소프라노를 택했던 것이지요. 카르멘의 중저음은 대단히 고혹적이고 섹시합니다. 특히 하바네라에서 보여주는 관능미는 돈 호세의 넋을 빼놓지요.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카르멘>의 하바네라는 묘한 사랑의 심리를 꿰뚫고 있습니다. 카르멘은 이 노래에서 사랑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조롱합니다. 사랑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새와 같아서 잡으려면 멀어지고 가먼히 있으면 다가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새처럼 카르멘은 달려드는 남자들을 제쳐두고 가만히 있는 돈 호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돈 호세는 대꾸도 하지 않지요. 그러자 카르멘은 경고합니다 “언젠가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 테고 그러면 나는 당신을 거들떠보지 않을지도 모르니 조심하세요.” 변덕스러운 사랑의 속성은 어느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 집시 여인 카르멘의 자유분방함과도 상통합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 해방주의자
그렇습니다. 카르멘은 집시 여인입니다. 카르멘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시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 오페라에서는 집시의 특성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집시하면 까무잡잡한 피부에 까만 곱슬머리, 그리고 낭만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요. 음악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라사테의 유명한 바이올린 곡 「치고이네르바이젠」이라든가 집시의 전통음악을 끌어다 쓴 브람스의「헝가리 춤곡」을 들어보면 낭만의 정취가 물씬 전해져옵니다.
집시가 낭만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음악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저기 떠도는 유랑 생활 탓에 집시는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지요. 프랑스에서는 집시를 ‘보헤미안’이라 불렀습니다. 이 명칭은 19세기 이후 근대에 와서는 다른 의미로 전용됩니다. 사회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와 시인을 집시족, 즉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도 그런 보헤미안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집시의 현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인도가 본향인 것으로 추정되는 집시는 자기 땅에서 쫓겨나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아왔습니다. 유목민처럼 오랜 세월 이곳저곳을 떠도는 방랑 생활을 해야 했지요. 정처 없이 떠돌며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까닭에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이들은 공장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거나 밀수 또는 도둑질로 연명했습니다. 지금도 로마나 파리 등 유럽 도시에서는 집시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물건을 낚아채가는 광경을 왕왕 목격할 수 있지요. 그런 범법 행위 때문에 유럽인들은 집시를 더욱 핍박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유대인과 더불어 수십만 명에 이르는 집시들이 나치에게 학살당하기도 했습니다.
오래 세월 고단한 유랑생활을 하면서 집시들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체득했습니다. 오페라 속의 카르멘은 집시의 자유를 온몸으로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자유에는 위험이 따르지요. 그것을 카르멘은 누구보다 잘 알고요. 카르멘이 돈 호세를 만난 후 작품 곳곳에서는 죽음이 임시됩니다. 카드 점을 볼 때에도 돈 호세가 자신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라는 점괘가 나오는데, 카르멘은 이 점괘를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카르멘과 돈 호세는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카르멘은 반사회적이고 자유분방한 집시인 반면 돈 호세는 유럽 백인사회의 규범대로 살아온 사람이었지요. 더구나 지금은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하는 군인 신분이고요, 고향에는 자나깨나 아들을 걱정하는 홀어머니도 계십니다. 돈 호세는 고향에서 사고를 치고 도망치듯 군에 입대했지만 어머니의 염원대로 반듯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씨 착한 젊은이입니다. 연적인 투우사 에스카미요처럼 호탕한 성격도 아니고 그저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카르멘은 그런 돈 호세의 마음을 공연히 건드려 뒤흔들어놓고는 달아날 궁리만 합니다. 순진했던 돈 호세는 카르멘의 배신에 큰 상처를 받습니다. 농락당했다는 수치심과 그녀의 새 연인투우사에 대한 질투심으로, 죽음까지 불사하는 극단적인 위험을 자초하게 됩니다. 카르멘은 돈 호세의 순진함과 그것의 뒷면을 이루는 극단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카르멘은 한 남자에게 속박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한 남자를 파멸에 이르게 한 팜파탈이 아니라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한 여성 해방주의자라는 페미니즘적 해석도 가능하겠지요.
카르멘을 어떤 캐릭터로 해석하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지 1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초연 때와 다름없는 신선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는 사 실입니다.
‘금난새의 오페라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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