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다시, 빛 속으로

송담(松潭) 2018. 3. 9. 17:21

 

다시, 빛 속으로

 

 

< 1 >

 

 “여기도 노숙자 신세인 걸요 태항산채 노숙자라고국이 아니니까, 이렇게 헤매 다녀야 하니까요. 죽음이 항상 옆에 대동해 있고, 죽음의 색깔이 삶의 의지보다 진하니까요.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잖아요, 이렇게 산채를 헤매다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어디론가 소멸되겠죠. 별똥별이 그렇잖아요? 생명을 태우며 사라지는 물체....”

 

 그녀의 화사한 얼굴과는 달리 어조에 허무함이 묻어났다. 그녀의 따스한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새벽 한기에 움츠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고 싶었다. 2년을 연안과 태항분맹에 있었다고 연안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조선의용군 의무군관이 되었다고 했다.

 

 

< 2 >

 

 자작나무 숲은 일대 장관이었다. 건장한 남자 몸통 굵기에 키는 족히 30미터쯤 되는 휜 수피의 자작나무가 빽빽했다. 마치 백색 유니폼을 입은 러시아 병정들의 열병식 같았다. 옅은 안개가 나뭇가지에 걸렸다가 스멀스멀 이동했다. 저 나무 심지에는 어떤 사연이 있기에 흰색 피부로 몸을 둘렀는가. 자작나무가 뿜어내는 숨결이 폐부로 스며들었다.

 

 연전에 백석白石조선일보> 편집실에서 만난 일이 떠올랐다. 문학부 기자였던 백석은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백석은 학예부 기자로 말석에 자리한 사량을 보고는 호기롭게 말했었지.

어이, 시창 군! 자작나무로 삶는 국숫집을 찾아냈어. 오늘 한 잔 어때?”

 

 불콰하게 웃는 얼굴엔 애수가 서렸었지. 백석은 자작나무 원향을 찾아 장춘인지 합이빈哈爾濱인지 가버리곤 무소식이었다. 사량은 그가 쓴 시 <백화白樺>를 기억한다.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甘露(감로) 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이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 3 >

 

 

 이역만리異坡萬里 자작나무 숲속에서 고향 여인의 한 서린 얘기를 들어줄 순간이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휜 수피樹皮를 두른 한 그루의 자작나무였다.

 

 “자작나무 숲에서 울다니, 실은 저 휜 수피가 자작의 울음이에요. 여우, 승냥이 울음소리, 박새, 종달새, 뻐꾸기 울음소리를 다 머금고 나서 저런 흰 수피를 내밀잖아요. 그러니 사람마저 그 앞에서 울 수는 없는 노릇인데, 오늘은 실수를 했네요. 다 작가 선생님 때문이에요!”

 

 하남점에 들어서니 장이 섰다. 닭과 오리장수가 흥정을 하고 있었고, 빗자루, 호미, 낫이 멍석에 널려 있었다. 엿과 강냉이도 있었고, 쑥떡 같은 먹거리, 국수를 말아 파는 장사도 보였다. 사량은 사탕 엿, 과자를 샀다. 환자 회복에 당분이 좋다는 말을 어릴 적부터 들었다 봉쇄 선을 넘을 때 남장촌에서 합류한 노인이 알아보고 반가워 소리쳤다.

 

 “작가 선상, 그새 어디 있었음매? 궁금했는디... 옆에 샥시는 어디서 왔음둥? 선이 무척 고우네 그랴.”

 

 노인은 몇 가지 물건을 사들고 따라붙었다.

 "여기도 공산사회는 아닌가 봅매, 저래 물건을 내놓고 팔면 워찌 나눠 먹겠음둥?"

 ", 저 위 숙소에서 글을 썼지요. 여기 여동무는 의료대원입니다. 홍숙영 동지라고

 “참 곱게도 생겼음매, 근데, 척 보아 허니 샥시와 작가 선상이 천생연분으로 보임매, 내 직감은 영락없는 것임둥, , 작가 선상이 염통이 안 좋아, 혈색이 파리한 게 영 근심 임매. 샥시가 잘 보살펴야 하것음둥, 안 그란감?"

 “, 그러지요!”

 숙영의 대답이 사량의 핀잔과 겹쳤다.

 “영감님, 처자식 있는 몸이 무슨 천생연분이라고!"

 "아니 천생연분이 무슨 부부에게만 있는 줄 아심매? 살다 보면 뗄 수 없는 연이 있는 법이지비! 두고 보면 알 것임매."

 

< 4 >

 

 사량은 요 며칠 일어난 일을 기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록 사소한 사건들이기는 하나 먼 훗날 누가 들추어 본다면 항일독립운동이 그렇게 먼 산협 골짜기마다 켜진 외로운 횃불이 모여 이뤄진 불의 강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삐오넬 소년에서 저 김두봉 선생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오직 조선 독립을 위해 이역만리 산협에서 일본군과 싸웠다는 사실 자체로도 감격스러운 소역사다. 수많은 지류가 흘러 대하를 이루는 법, 사량은 작은 지류가 만든 여울과 물줄기를 따라 무작정 흘러내려 갈 요량이었다.

 

 밤이 깊어 갔다. 8월 중순의 밤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일본이 패망한다고 생각하니 먹구름이 걷히는 듯했다. 사량은 악명 높던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강압통치 하에서 태어났고, 내선융화를 부르짖던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의 무단통치 하에서 사회현실에 눈을 떴다. 고등보통학교(중학교) 4학년 때 광주학생의거 기념 동맹휴학을 주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마경찰이 교문을 가로막았다. 무장경찰이 데모대를 해산하려 달려들었고, 시위 주동자를 색출해 체포했다. 사량은 시위대 앞줄에 서 있다가 엉겁결에 피신했는데, 늙은 순사가 뒤를 쫓았다. 그가 소리쳤다.

 “빨리 내빼라, 빨리 내빼라!"

 조선인 순사였다.

 

 사량은 있는 힘껏 도망쳐 평양 변두리 어느 골목길에 접어들었고 허름한 집에 뛰어들었다. 노인 혼자 사는 집이었다. 그곳에서 며칠을 은신했다. 노인이 평양 시내 집에 들러 옷가지와 얼마간의 돈을 가져다주었다.

 

 일본 밀항은 그렇게 시작됐다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무모한 밀항이었다. 교토대학京都大學에 다니던 형이 부산 항구를 떠돌던 사량에게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제복과 위조한 도항증을 가져왔다. 관부연락선을 처음 타봤다. 검푸른 현해탄이 조선인의 애환을 싣고 나르는 눈물과 회한의 해로海路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사량만이 간직한 조선적 체험의 신경망과 감촉을 일본어로는 도저히 건드릴 수 없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 간극은 언어의 문제일 것이다. 민족어는 수천 년 닮고 누적된 겹겹의 민족정서를 품고 있다. 내지어內地語(일본어)로 조선인의 한의 심성을 형상화할 수 없듯이, 일본어로 조선인의 정서적 신경망에 접속하지 못한다. 내지어로 변방 민족의 습속과 운명을 그려 낸다고? 그것이 일본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고? 애초에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럼에도 내지어로 쓰는 국문으로 쓰든 글쓰기의 세계가 통치논리에 봉사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 현실에서 결국 사량은 붓을 접었다. 탈출을 결심한 것도 그때였다.

 

 지난 석 달 남짓 탈출의 시간은 가슴속을 가로지른 장벽을 걷어 내는 시간이었다. 천근만근 짓누르던 압제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었다. 낯선 시간이기도 했다. 그 낯선 시간에 오히려 언어는 샘솟았다. 정서와 감각이 살아났고, 민족의 의미가 태항산 녹음처럼 점점 푸르게 다가왔다.

 

 중국인민의 풍습은 나름대로 정겨웠고 눈물겨웠다. 초원과 구릉에 모여 사는 그들의 생활은 궁핍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눠 가며 사는 모습이야말로 문학 그 자체였다. 하찮은 병에 들어 시름시름 앓다 생명을 등지는 이들, 아사한 사람들, 일본군에 부모를 잃고 홀로 헤매는 고아들의 고통과 애환이 문학이었다.

 

 창밖이 훤해졌다. 또 밤을 샌 모양이다. 여름 아침은 뜻밖에 일찍 찾아와 인사를 건네고 곧장 뜨거운 햇살을 쏟게 마련이다. 매미가 울었다. 새들이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옥구슬 소리를 냈다.

 

< 5 >

 

 ‘가자! 가능하면 멀리 가자! 일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경의 임시정부로 가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으나 너무 멀고 희미했고, 접선할 광복군의 소재는 너무 유동적이었다. 화북과 화중지역, 화남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일본군의 감시가 닿는 곳이 많았다. 사량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너무 알려진 작가였다. 가능하면 멀리 가야 했다.

 

 태항산을 생각해 낸 것은 그런 이유였다. 태항산 유격대가 공산주의 전사들이라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주의를 표방한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해 독립운동조직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샀다.

 

 국민당 정부는 부패했고, 전의(戰意)가 없었고, 군벌(軍閥)들은 일본군과 밀거래를 했다. 이에 비하면 팔로군은 당당했다. 인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농사를 같이 지었고, 마을 재건을 도왔으, 수로를 만들어 식수와 생활수를 공급했다. 인민의 식량을 징발하면 반드시 수납증명서를 발급했다. 팔로군과 촌민은 한몸이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성향이 농후해도 태항산은 사량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것이 조선 독립 이후 어떤 정치적 혼란과 격렬한 투쟁을 몰고 올 것인가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독립이면 족했다. 일본의 존재가 소멸된 곳이면 족했다. 그런데 이제 전혀 다른 종류의 포격소리가 개시되는 듯했다.

 

 사량은 종잡을 수 없었다. 가까운 미래에 몰려올 먹구름을 글쓰기에만 전념했던 일개 작가가 어찌 예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이 남긴 글과 말이 정치적 의미망을 벗어나기에는 너무 유명한 작가였고 일본 문단과 조선 문단에서 주목을 너무 많이 받은 작가였다.

 

 “조선에 입국하면 작가 동무는 할 일이 많을 거요. 그런데 그 전에 무산계급을 향한 동무의 무한한 애정을 입증해야 하오. 친일행위에 대한 참회와 구국전선의 대오를 향한 지극한 봉사정신을 보이라고 할 것이오. 개인의 과거사에 오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깊은 참회와 열성을 요구받을 것이오. 무산대중을 위한 나라가 그냥 건설되는 것이 아니거든. 작가 동무야 태항산에 왔으니 참회를 입증한 것이기는 하지 열성이 문제요!"

 

 열성이라 무엇을 향한 열성인가? 사량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문학과 예술이 새 시대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는 장지민의 말에서 어떤 결기와 동시에 강압이 느껴졌다. 그 강압은 일제가 강제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인가?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지 못하다는 말인가? 문학과 예술이 구국전선의 모범 일꾼이 되어 야 한다는 그의 말이 느릿하게 전진하는 행렬의 자유를 가로막았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 6 >

 

 ‘10월 유신이 선포된 후 8개월이 지났지만 시내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민족중흥과 경제성장이 정권이 내세운 목표였다. 정권의 정당성에 시비를 거는 모든 저항과 도전은 민족주의 명분으로 처단됐다. 북한은 한반도 민족주의를 두 동강 낸 주적主敵이었다. 북한은 남한을 원쑤로 불렀다.

 

 정권 도전세력과 모든 유형의 저항운동에는 용공 혐의가 씌워졌다. 반공은 자유를 항아리 안에 가두는 위력을 발휘했다. 6.25전쟁은 20년 전에 끝났지만, 그것이 남긴 상흔은 두 개의 조선을 정상궤도에서 이탈한 변형국가로 만들었다. 북한이 게릴라식 유격대 국가를 건설했다면, 남한은 정보부, 경찰, 군대가 외곽을 지키는 가두리 양식장이었다.

 골목 전봇대마다, 게시판에, 그리고 학교와 공공기관에 표어가 나부꼈다.

 반공방첩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수상한 자는 즉시 신고하세요

 부랑자는 수상한 사람이었고, 정신병자와 무연고인 즉각 복지원으로 끌려갔다.

 

< 7 >

 

 일본 하출서방신사(河出書房新社)에서 김사량(金史良) 작가 전집이 출간되었다. 4권으로 김사량이 아쿠타가와 후보상을 수상한 작품 <빛 속으로>를 포함해 195010월 전쟁 중 행방불명될 때까지 작가가 쓴 모든 작품이 망라되었다.

 이번 전집 출간을 위해 출판사 측은 재일 작가 김달수의 회고와 김사량 작가가 도쿄제국대학 유학 당시 교유했던 일본 문인들의 증언을 꼼꼼히 수집해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려 모든 노력을 기울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활동한 조선인 작가 중 가장 뛰어난 문재()를 보였던 김사량은 일본어로 쓰면서도 조선의 민족적 비애를 서정격 감성적으로 담아내는 데에 탁월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국 문단과 평단에서는 김사량이 일본어로 썼다는 이유로,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평양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이유에서 한국문학사에 편입시키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한국문학사를 더욱 풍요롭게 하려면 김사량 작품의 의미와 위상을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의 고향은 평양이지만, 해방 전에는 서울과 도쿄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평양으로 돌아가 여러 유형의 글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생, 본명은 김시창(金時昌)

 

< 8 >

 

 섬진강이 나타났다. 꾸물거리는 날씨에도 섬진강물은 맑게 흘렀다. 겨울이라 수량이 줄어 여울진 곳이 더러 보였다, 저런 여울을 수백, 수천 개나 만들면서 강물은 하류로 흘러들어 기어이 바다를 만난다.

 

 바다에 이르면 여울의 기억은 해산할까, 산촌의 고독과 강촌의 이별을 담아 은빛 강물로 흐르는 섬진강은 여인의 옷고름처럼 산기슭을 감싸며 휘어졌다. 여인의 옷고름을 풀어헤치듯 손이라도 담그고 싶은 욕망이 불현듯 샘솟자 버스는 강과 잠시 헤어져 굽은 길을 돌았다. 봉현은 까닭을 알 수 없는 의욕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이 근거 없는 의욕으로 살아간다. 서로 부대끼고 시기하는 세월 속에서, 애증이 엇갈리는 교차로에서 사람들은 삶의 누추함을 추스르며 예견할 수 없는 인생의 항로를 한 발짝씩 더듬어 나아간다. 구부러지고 굴곡진 곳이 문학의 발원지다. 촌락의 애환을 쓸어 담아 여울물에 헹구고 물결이 휘도는 소()에 퇴적하며 기어이 흐름을 이어 가는 섬진강은 그 자체가 문학이었다.

 

< 9 >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다. 역사의 고삐를 장악하려는 각종 이데올로기가 충돌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어야 했다. 수천만 명의 생명이 전쟁터에서 희생됐다. 그들은 이성적 판단의 희생자인가? 아니다. 역사는 절대적 진리의 길을 따라 운행하지 않는다.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적 변화에 다라 해석의 관점이 달라질 뿐이다. 관점의 차이가 개별 인간의 죽고 사는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야만이다.

 

 가치관은 상대적이다. 입장과 관점의 차이가 역사를 야만으로부터 구출해 주는 이성의 발원지라면 아버지는 결국 역사를 절대화하는 회오리바람을 무릅쓰고 이성의 광산을 캐고 있었던 거다.

 

 빛은 이데올로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야만으로 몰고 가는 모든 억압의 가면을 벗기는 행위가 빛이다. 전쟁터에서 빛을 찾는 데에 절망한 아버지는 젊은 시절 빛을 찾아 헤맸던 그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자연과 사투하며 살아가는 화전민의 삶 속에서 빛 속으로의 충만한 의욕을 발견한 홍천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 10 >

 

 봉현은 가방에서 삼베에 싸인 편지를 꺼냈다. 삼베가 삭아서 조각이 떨어졌다. 창호지에 쓴 글이었는데 잉크가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봉현은 조심스레 창호지를 펼쳤다.

 

 처 창옥 전

 이제 생명이 얼마 안 남았음을 느끼오, 여보 내가 한 번도 그리 불러 보지 못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리 부르고 있소. 여보, 창옥이. 고생 많았소. 낭림이, 정림이가 그립소.

 

 어머니 병환은 좀 어떠오. 전장에 나와 절망이 더 쌓였소. 회복할 기력이 없구려. 생명의 마지막 심지가 꺼지고 있소. 역사가 나를 밀어낸 것이오. 한 사람의 미약한 작가가 파도처럼 밀려드는 물결을 감당하기엔 벅찼소. 우리의 고난이 후손들에게 반복되지 않을 것을 바랄 뿐이오. 빛은 없었소. 우리의 생애엔. 한 줄기 빛을 보았던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소.

 

 그러나 여기에서 생과 작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오. 혹시 남하 하거든 언젠가 나의 무덤을 발견하게 될 것이오, 낭림이, 정림이, 어머니를 부탁하오. 잘 사시오.

 

 어제 저녁 별빛이 유난히 찬란했소. 새벽에 별빛이 스러지면 내가왔다 간 줄 아시오. 여불비餘不備.

 

  송호근 / ‘다시, 빛 속으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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