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성남문학인작품선집 원고>
설악산원정기(雪嶽山遠征記)
운산 지교헌(雲山 池敎憲)
7월 9일 밤 10시 20분, 원정대 일행 8명은 청대산악기(淸大山岳旗)를 펄럭이며 태백산맥의 정수라고 부르는 웅대한 설악영봉(雪嶽靈峰)을 정복하기 위하여 패기만만한 첫발을 내디디었다. 주부식과 비상식품을 비롯하여 텐트 자일 액스 쇼벨 버너 코펠 판초 모포 등으로 가득 채워진 배낭을 지고 작업복과 워커에 캡을 눌러 쓴 자세는 어디로 보나 손색없는 산악인이었다.
그러나 조치원 천안 수원을 거쳐 서울역에 하차하여 신설동시발 급행버스로 청평 춘천 양구 인제를 거쳐 원통리에서 차를 바꿔 타고 외가평에 도착하니 너무나 장시간의 승차에 지칠대로 지치고 말았다. 대중식당의 유혹을 뿌리치고 천변에서 처녀 뱃칭(취사)을 시작하였다. 한편에서는 쌀을 일어 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여 17시간의 기갈을 메꾸고 나니 백담사까지의 낯선 20리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축척 50,000분의 1 지도를 펴들고 리더를 앞세워 전진하는 우리에게는 불과 20분도 걷기 전에 길이 막히고 말았다. 전례 없이 잦았던 호우에 길이 씻겨버리고 세차게 흐르는 계류 속에 그림자를 던진 절벽이 빗겨 있을 뿐이었다. 한참동안이나 지도와 콤파스를 들여다보며 정찰하던 나머지 바지자락을 적시면서 개울을 지나 건너 편 언덕의 오솔길을 더듬어 걸었다. 드높이 솟구친 양쪽 산마루를 올려다보면서 수없이 꼬부라진 계곡을 따라 3시간 40분이나 걸었을 때는 벌써 주위의 얼굴이 분간되기 어려울 만큼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어두운 산 그림자 속에 면사포(面紗布)처럼 아리따운 천변의 차돌 밭을 옆으로 끼고 울창한 삼림 밑에 자리 잡은 백담사(百潭寺)에 도착하였다. 스님의 허락을 받아 한쪽 툇마루에서 건빵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땀이 흠뻑 밴 내의를 갈아입고 나서 판초와 모포 속에서 완강한 수마(睡魔)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때때로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들으면서 대웅전을 배경으로 카메라 샷터를 누르고 봉정암(鳳頂庵)까지 20km의 노정(路程)을 출발하였다. 서울 Y대학에서 단신으로 나선 T군이 포터를 구하였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1킬로미터쯤 전진하니 두어 채의 모옥(茅屋)이 자리 잡은 동구에서 보초병이 집총하고 일행을 검문하기 시작하였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서류와 원정계획서를 제시하고도 장교에게 배낭 속 장비검색을 받고나서 ‘야간행동엄금’의 경고를 받고 보니 거의 한 시간이나 소비되었다. 우리는 뜻밖에도 탐스런 미모의 처녀가 물동이를 이고 걷는 수줍은 맵시를 보고 기적이라도 발견한 듯이 찬탄을 아끼지 않으면서 멋대로 꼬부라진 계곡을 꿰뚫고 전진하였다. 포터의 말로는 이곳 주민들은 약간의 밭농사에 양봉과 약초채취를 생업으로 생계를 꾸린다고 한다. 이윽고 너와지붕에 굵은 돌을 얹어놓은 통나무집과 손바닥처럼 작은 비탈 밭을 지나고 나니 빽빽한 잡목의 숲에서는 금세라도 맹수가 포효하며 튀어나올 것만 같다.
사람의 발자취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거친 바위 길을 비실거리며 걷노라면 어느 듯 비좁은 숲길이 나타나 우리의 불안을 덜어주곤 했지만 네 댓 길이나 되는 바위 벼랑을 옆으로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몸을 완전히 암벽에 붙이고 미끄러운 워커를 조심스럽게 내밀어 앞 뒷사람이 서로 의지하면서 겨우 통과한 이 벼랑에서는 2년 전에 M대학생이 추락하여 배낭은 잃어버리고 목숨은 요행으로 건졌다고 한다. 거센 물결이 용솟음치는 곳이라 미끄러져 떨어지는 순간, 배낭이 벗겨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한다.
정오가 넘어서야 수렴동(水簾洞)에 이르러 10여 명이 풍우를 가릴 수 있는 커다란 반석 밑에 배낭을 내려놓고 목욕과 취사를 아울러 마치고 나서 다시 오후의 행군을 시작하였다. 깎아 놓은 듯 한 수직의 절벽에는 바위를 흐르는 물줄기가 유난히 번쩍여서 말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따금 가다가 바위 위에 포개놓은 케언(cairn)은 심산유곡의 유일한 도표(道標)이다. 가로누운 고목을 말 타듯 넘어가며 이쪽저쪽으로 기어오르고 우회하면서 자일을 타고 기어올라 쌍폭(雙瀑)을 지나고 강파른 비탈을 올라가면서 우리는 다만 경이에 찬 눈으로 나무와 바위와 물을 감상하고 군데군데 피어난 새하얀 목련화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오묘한 물소리의 선율을 음미하였다.
다리는 무겁고 어깨는 아프며 옷은 완전히 땀에 젖어버리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은 때 묻은 모자를 적시다 못해 안경을 마구 때린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틈만 나면 아무 곳에나 벌렁 벌렁 누워버리는 습성에 빠져버렸다. 물에 젖은 이끼에나 바위에나 나무에나 흙에나 다만 몇 초라도 배낭을 짊어진 채 벌렁 누워 눈을 깜빡이면서 창공과 구름과, 오버행에 피어난 새하얀 에델바이쓰(Edelweiss)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휴게시간의 간식이라고는 한 두 쪽의 비스켓과 건빵이 고작이다. 요령 있는 K군은 황설탕을 재빨리 수통에 풀어 마시다가 탄로되어 ‘검정물’이라는 별명을 얻고 그 덕택에 일행도 검정감로수를 마시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비에 쓸려 내린 봉정암(鳳頂庵) 안내판을 거두어 소나무에 못 박아 걸어놓고 우리는 포터와 작별하였다. 여기서부터는 길을 잃거나 위험에 빠질 염려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푸석푸석한 커다란 돌무더기가 70도 이상이나 기울어진 계곡이 가로놓여 있었다. 미리 준비한 장갑을 꺼내어 날카로운 돌 서슬을 붙들고 돌이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서로서로 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네 발 짐승처럼 기어올랐다. 돌이 구를 때마다 경고를 발하며 두 세 차례의 휴게로 위험한 계곡을 벗어나 우리는 다시 잡목이 빽빽한 능선을 위로 감돌아 전진하였다. 지도에 나타난 능선을 따라 한없이 올라가야 하리라고 믿은 우리는 예상 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곳이 바로 당일의 목적지인 봉정암이라는 것을 알자 일제히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암자 뒤로는 몇 길 씩 되는 바위가 솟아 있고 탑이 서 있는 서쪽 언덕에는 줄기차게 늘어선 무수한 산줄기가 기개를 다투며 하늘을 찌르고 동북쪽으로는 흰 솜처럼 부드러운 구름이 끝없이 깔려 희고 잔잔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때마침 저물어가는 석양에 오색으로 물든 광활하고 무변한 운해(雲海)에 측량할 수 없는 우주의 신비를 느끼게 되었다.
몇 번째 계속되는 취사 기술은 언제나 만족할 만 하였다. 두 개의 코펠에 끓인 스프는 맛이 좋은 탓으로 끼마다 바닥이 드러났다. 몇 개의 풋고추와 양파를 가지면 아껴가며 된장에 찍어 먹는 풍경은 생일의 성찬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나자 펙을 뽑아 텐트를 챙기고 반합의 검은 끄름을 솔잎으로 닦아 배낭에 매어달고 대청봉 정복의 장도에 올랐다. 물을 많이 마신 탓인지 첫 발작부터 발이 떨어지지 않고 땀이 나며 숨이 가쁘다. 앞 사람의 손을 잡고 잠자리처럼 쉬면서 소청봉에 올랐을 때는 동해의 어설픈 해안선이 엷은 안개에 가려 몽롱하게 내려다보였다. 뜻밖에도 이름 없는 국군의 유해(遺骸)와 녹슨 실탄들이 발 옆에 굴러 있고 육중한 나무들이 포화에 부러져 말라 죽은 채 수피는 벗어지고 하얀 목질만이 드러나 6.25 당시의 혈전(血戰)을 능히 상상케 한다. 국군의 유해는 거의 훼손되고 일부만 남았지만 그대로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란 너무나 비참하고 비인도적이며 반인간적인 상징처럼 가슴 아프게 다가오며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우리는 미구에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해발 1,708m)에 올랐다. 산정에서 용맹스런 국군과 감격적인 악수를 나누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멀리 휴전선 너머로 흰 구름에 절반이나 가려진 금강산이 동해로 돌출하고 있다. 동으로는 하늘과 맞닿은 동해가 요요하고 북으로는 청록의 산맥이 첩첩하고 서와 남으로는 점점 낮아지는 수천수만의 산등성너머로 서해와 남해마저 한 눈에 들어오는 듯싶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오오! 한없이 넓고 크고 수려한 강산이여……. 이 빼어난 강산을 세계만방에 목이 터지도록 외치며 자랑하고 싶구나.…….”
산 밑에서는 한 오리의 바람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벽공에 용립한 이곳 대청봉에서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친다. 기슭에는 바람에 못 이겨 비탈에 완전히 달라붙은 수많은 잣나무들이 잔디처럼 깔려 탄력 있는 보료가 되어 주기도 한다.
언제까지나 내려다보고만 싶은 산과 바다와 계곡이지만 우리는 시간에 쫓기어 천불동(千佛洞)을 왼쪽으로 끼고 서서히 화채봉(華彩峰)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백담사에서 대청봉까지도 그랬지만 대청봉에서 화채봉까지도 지도에는 아무런 길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천불동의 천험(天險)이 두렵기 때문에 몇 갑절이나 먼 길로 우회하기로 한 것이다. 한 시간 이상이나 비탈길을 내려가니 오르막길에 이르렀다. 거리와 방위로 보아 화채봉 능선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예정대로 전진하다 보면 능선에서 물 한 방울 구하지 못하고 굶어야 할 것이며 더욱이 수목으로 인하여 텐트 한 장을 칠 수도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먼 코스로 고생하기 보다는 한 시 바삐 신흥사(神興寺)에 도착하여 외설악의 비경을 탐색해야한다고 결론하였다. 일행은 아무도 갑작스런 진로변경에 이의하지 않고 남한에서 가장 험악하다고 알려진 천불동계곡을 향하여 돌진하기 시작하였다.
우거진 나뭇가지와 얽히고설킨 덩굴을 헤쳐 가며 얼마쯤 내려갔을 때 우리는 좁은 골짜기를 발견하고 낙엽과 돌 틈을 흐르는 물로 간단한 요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이봉투에 단단히 싸두었던 찹쌀미숫가루는 구미에 맞지 않아 먹을 수가 없었기에 건빵을 버터에 찍어 조금이나마 공복을 채웠다. 여기서부터 작은 물줄기를 따라 새로운 코스를 개척해나가는 동안 미끄러운 벼랑이 연속되고 폭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엄지보다도 굵고 길이 40m쯤이나 되는 자일을 나뭇가지에 걸어 두 겹으로 드리우고 두 팔을 뻗어 등 뒤로 끼어 잡고 다리를 암벽에 수직으로 세워서 내려갔다. 때로는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자일도 이용하면서 상당한 거리를 전진하였으나 우리는 완전히 용기를 잃고 말았다. 여기서 L교수는 자일을 놓치고 불과 30cm정도만 앞으로 미끄러졌어도 그대로 폭포 속으로 사라질 번 한 것이다. 뜻하지 않은, 너무나 아찔한 순간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제는 자일도 이용할 수 없는 완전한 절벽뿐이었다. 뱀도 기어오르지 못할 수직의 절벽이었다. 선두에 섰던 L교수가 생명을 보존한 것은 천우신조였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포터도 두 사람이나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운무는 점점 짙어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니 사태는 더욱 긴박해졌다. 만약 소나기라도 퍼부어 수량이 불면 내려가던 길을 되돌아설 수도 없이 물이 빠질 때까지는 풀 섶에 매어달려 있을 수밖에는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서둘러 미끄럽고 비좁은 골짜기를 되돌아 올라가 비상식하던 장소에 이르러서야 겨우 살아났다는 안도의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여기서 또다시 화채봉으로 가는 길을 정찰하고 전진을 시작하기까지는 무려 3시간이나 방황한 셈이었다. 우리는 천불동계곡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죽음의 계곡’(?)으로 달려들었다가 혼비백산하여 뛰쳐나온 것이었고 갈피를 잡지 못하여 허둥대기만 하였던 것이다.
비는 우수수 바람에 몰려와도 행동에 거추장스러워 판초마저 벗어버린 채 또다시 잡목의 터널을 뚫고 전진하였다. 우리는 이윽고 어느 능선에 도착하였고 고지에 이르렀으나 봉우리는 연달아 나타나기 때문에 어느 것이 화채봉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해는 벌써 넘어가고 하늘을 뒤덮은 밀림에 비는 그치지 않고 뿌리는가하면 운무는 완전히 계곡을 뒤덮어서 지도와 콤파스 밖에는 달리 의지할 것이 없었다. 어떻든 우리가 전진하고 있는 능선은 화채봉을 주봉으로 하여 동북으로 벋은 것이어서 전진하다보면 신흥사 부근이 아니면 더 멀리 낙산사부근으로 나가게 되리라는 애매한 추측뿐이었다. 수통은 알뜰히 비워져서 목이 타들어가도 마실 물이 없으니 건빵조차도 먹지 못하고, 긴장할 대로 긴장한 우리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커다란 반석 밑에서 노숙하자는 소수의견에도 불구하고 강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 나무 밑을 엎드려 기어가기도 하고 위로 기어 넘기도 하면서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특별공격대처럼 돌격하였다. 발이고 다리고 등이고 어느 곳이나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필사적인 돌격이었다. 만일에 몇 걸음이라도 앞사람에게서 멀어지기만 하면 바로 길을 잃어버리고 칠야의 숲속에서 낙오하고 말 형편이었다. 그러나 숨이 몹시 달아오르고 다리를 떼어놓기 어려울 무렵, 우리는 흐릿한 십자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방팔방을 살펴보며 대체 어디로부터 어디로 통하는 길인지를 지도에서 찾다가 문득 북쪽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한 줄기의 불빛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목적지인 신흥사이며 거리는 불과 2-3km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진로를 바꾸어 왼편 비탈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오후의 행군 시간으로 미루어보아 이제 얼마 가지 않아 개울과 도로로 나가게 되리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비탈길은 경사가 대단히 급하고 가시가 손을 찌를 뿐만 아니라 미구에 폭포나 절벽이 나타날 것이고 또다시 위험에 빠질 것이 분명하였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궁리하였다. 나는 서슴지 않고 L교수에게 건의하였다. ‘전진은 목숨을 거는 모험이니 후퇴하는 것만이 상책’이라고. 이리하여 다시 십자로로 퇴각하게 되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당하였던 위험을 상기하고 겁에 질린 셈이었다. 모두는 벙어리가 되어 말이 없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십자로로 후퇴한 일행은 자디 잔 굴참나무 몇 그루를 제거하고 한 개의 M텐트를 치게 되었다. 쇼벨로 똘을 치고 물이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조치를 취하고 나서 비좁은 텐트 속에 웅크리고 앉았다. 젖은 옷과 신을 벗고 내의를 갈아입었으나 까꿀막 지고 울퉁불퉁한 바닥에 깐 판초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텐트는 새어서 빗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전신이 오싹오싹 오므라들었다. 안경도 벗지 못 한 채 쪼그리고 앉아 졸며 지새는 동안에 시침은 0:00시에서 제자리걸음을 치며 게으름을 피웠다.
북쪽 하늘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은 온 산천을 들먹이며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빗발은 갈잎과 텐트를 사정없이 때렸다. 약간의 비상식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저녁을 굶은 위에 잠자리마저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산악인의 신고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다. 밥을 지을 물은 고사하고 목을 추길 한 모금의 물도 없어서 L교수는 천막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물을 두어 모금이나 들이켜고 말았다.
아침 다섯 시가 되어 텐트 위에 고인 검정빗물을 마시고 수통에도 가득 받아 넣었다. 젖은 옷을 다시 꼬이고 판초를 걸친 후에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로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비는 멎지 않고 옷은 완전히 젖고 워커 속에서는 물이 고여 찌걱거렸다. 솔잎에 묻은 물을 빨아 마시며 두어 시간쯤이나 걸었을 때 우리는 엷은 운무 속에서 꼬부라진 개울과 길을 발견하게 되고 얼마 아니하여 개울물을 마실 수 있었고 오정이 가까웠을 무렵에는 인가를 만나 하루 한 나절 만에 꿀 같은 이밥과 된장국을 포식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둘씩 셋씩 스크람을 짜고 보조 자일에 의지하면서 허리 위까지 용솟음치는 거센 개울을 목숨을 걸고 간신히 건넜다. 그리고 비가 개인 후의 따가운 햇살에 옷과 장비를 말리고 신흥사를 향하여 걸었다. 도로에서 바라보아도 천야만야하게 올려다 보이는 비룡폭포(飛龍瀑布)를 바라보며 천불동계곡의 준험에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밤중에 내려가던 비탈길은 바로 비룡폭포의 꼭대기로 보였다. 간담이 서늘하였다. 후지무라미사오[藤村操]가 투신하였다는 게곤노다끼[華嚴瀧]도 저런 모습일까 상상하기도 하였다.
신흥사는 서기 652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대웅전을 비롯하여 네 채의 건물이 웅장하다. 북한(北韓)체제하에서는 사찰 관리인이 한 사람 있었을 뿐, 승려들은 없었다고 하며 수복 후에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으로 많은 부흥을 가져왔다고 한다.
해는 지고 노을조차 슬어져 온 경내가 어두워질 무렵 나무 밑을 소요하는 처사들의 염불소리를 뒤로 두고 S대 별장을 찾아들어 여장을 풀었다. 이튿날 아침 내원암(內院庵)을 거쳐 석굴로 이루어진 계조암(繼祖庵)을 찾아 흔들바위를 거쳐 후록의 암벽에서 자일을 이용한 몇 가지 훈련을 반복하였다.
신흥사를 중심으로 설악산 최대의 폭포로 알려진 토왕성폭포(土王城瀑布) 육단폭포(六段瀑布) 오련폭포(五連瀑布) 양폭(兩瀑) 영주폭포(瀛州瀑布)를 비롯하여 선녀봉(仙女峰) 노적봉(露積峰) 비선대(飛仙臺) 이호담(二湖潭) 괴면암(怪面岩) 만물상(萬物相) 등, 많은 등반코스와 관광코스를 과감히 포기하고 세계 삼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의 하나라고 일컫는 낙산사(洛山寺)로 향하였다.
낙산사라는 이름은 보타낙하산(寶陀洛下山)에서 유래한 것이며 의상조사(義湘祖師)의 전설이 숨어 있다. 바람도 시원한 의상대와 법당 밑으로 해수가 파도치는 홍련암(紅蓮庵)을 답사하고 유명한 낙산 모기에 물리면서 의상대에서 하루를 쉬고 이튿날 아침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관동의 유일한 종단도로를 질주하는 차창 밖으로는 크고 작은 기선과 범선이 유유히 떠있고 펼쳐진 모래밭에는 맑은 물결이 넘나든다. 서해나 남해처럼 많은 도서로 뒤덮이지 않고 한없이 넓기만 한 만경창파의 호연한 기품은 형언할 수 없는 우주의 신비와 피안에의 동경(憧憬)으로 이어져 있었다.
묵호항에서는 속초 앞바다의 작은 섬이 보이는데 이 섬에서 금강산이 바라보인다고 한다. 기사문리(其士門里)까지는 북위 38도선 이북에 속하는 수복지구이지만 앞바다의 아담한 작은 섬은 이남에 속한다고 한다. 이 작은 섬은 윤택한 숲으로 싸였고 식수(食水)가 있다고 하며 섬 주위는 하얀 석벽(石壁)이어서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수많은 송림과 기암의 수려한 풍경을 뒤로 두고 주문진의 비릿한 오징어 냄새를 듬뿍 마시고 오죽헌(烏竹軒)과 경포대(鏡浦臺)를 거쳐 강릉역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자고나서 완전히 귀로에 오르게 되었다. 열차는 허위단심 태백준령을 넘어 석탄으로 물들여 진 검은 계류를 끼고 백천(柏川)과 철암(鐵岩)을 지나 죽령(竹嶺)을 꿰뚫고 충북선으로 들어섰다. (끝)
*** 이 글은 <청대춘추> 11호(1965) PP.81-87에 게재된 것을 옮긴 것이다. 당시는 주조활자로 인쇄하였고 한자(漢字)가 많이 혼용되었으며 맞춤법도 지금과는 차이가 있었으므로 옮기는 과정에서 많이 수정되었다. 필자는 당시 청대법학과의 조교 겸 강사로 근무하였고, 교양학부에서 독일어를 담당하고 있던 이병우 교수의 권유를 받아 산악반 행사에 참가하였다. -이 교수는 후에 서울의 중앙대로 자리를 옮겼다가 80년대에 들어 뜻하지 않은 신병으로 서거하였다.- 나는 이때부터 등산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한라산 지리산을 등반하고 계룡산과 속리산은 매년 몇 차례씩 등반하였다. 한라산은 두 차례나 등반하였으나 백록담(百鹿潭)의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감상할 수는 없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하였으나 한 번은 너무나 짙은 운무로, 한 번은 너무나 심한 폭우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라산 원정기’는 당시의 <충청일보>에 투고하였다. 50여 년 만에 <설악산원정기>를 다시 읽으면서 세상을 살아 온 나의 역정(歷程)이 등산의 역정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산에서 겪었던 신고(辛苦)와 환희는 고스란히 나의 인생을 되새김질하게 한다. 운산(雲山)은 동촌(東村), 청계산(淸溪山), 대용(大庸)과 함께 필자가 수시로 사용하는 자호(自號)이다. (2017.2.8 지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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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협, 한국공무원문협,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수필문학추천작가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중연한국학대학원 명예교수 (철학박사)
e-mail; d42490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