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불명의 ‘정치공학’
‘공학(工學)’의 사전적 정의는 각각 ‘공업의 이론, 기술, 생산 따위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공학계에 종사하고 있는 나는 예전부터 이 설명에 불만을 느껴왔다. 결과를 얻는 데 소요되는 비용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과학이라면, 공학은 구체적인 대상 혹은 목적물의 기능이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율로 작동하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는 명쾌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기공학은 전기에 관련된 모든 부분의 효율을 추구한다. 신재생에너지학은 화석연료의 문제점을 보완하므로 전기공학이고, 전력계통의 역률 개선은 전력 생산의 에너지 소비량을 줄일 수 있으므로 이 또한 전기공학이다. 그리고 환경공학자들에게 대규모 공기정화기의 소음과 배출가스는 줄여야 하는 주요 지표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릇 공학이라 함은 어떤 분야의 효율을 높여 우리네 살림살이에 어떤 형태로든 유익한 그 무언가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정치공학’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횡행하고 있다. 종합편성채널에 자주 등장하는 일부 정치시사 패널들과 아무 생각 없이 이에 장단을 맞추는 일부 정치인들이 정치공학이라는 단어를 특히 애용하고 있다.
내가 ‘정체불명’ ‘횡행’이라는 말을 쓴 것은 이 말이 국어사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정치는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 정치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정치라는 단어에는 이미 ‘효율 높임’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정치공학이라는 단어의 탄생에는 분명히 정치라는 물건에 어떤 음험한 덧칠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낯부끄러운, 하지만 종편방송이 아주 좋아하는 소재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보라. 이것이 앞에서 정의한 제대로 된 정치가 아님은 자명하다. 정치에 더해진 음험한 덧칠, 이를 간결히 그리고 격에 맞게 표현하는 단어는 정치공학이 아니라 ‘정치기법’,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정치술수’이다. 정치술수는 우리네 살림살이에 도움을 주는 도구가 아니라, 그네들의 잔치를 더 풍성하게 하고자 하는 행동에 불과하다. 정치술수는 우리네가 느끼는 자긍심의 상실도, 거기에서 오는 자괴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아픔과 분노와 애달픔을 한꺼번에 가져다주는 집단의 도구에 공학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가당치 않다. 더 이상 공학인의 한 사람으로 자존심을 짓밟히고 싶지 않다. 정치공학이라는 말은 퇴출되어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정치술수 자체가 퇴출되어야 한다.
홍영진 | 동명대 교수·전기공학과
(2017.1.4 경향신문)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촛불세력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 한다” “민주노총, 전교조가 나라를 장악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힘을 보태러 나왔다”고 했다.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속은 게 죄지, 땡전 한 푼 챙긴 게 뭐가 있느냐”고도 했다.
이들의 심리는 일종의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으로 보인다고 심리학자들은 분석했다. 촛불집회를 보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인한 반대 행동이라거나, 경제·사회적으로 배제된 노인들이 마지막 남은 자신들의 시대와 가치까지 말살된다고 느껴 저항에 나선 것이란 분석도 있다. 엊그제 여론조사 결과 탄핵 찬성은 79%, 반대는 15%였다. 콘크리트처럼 완강한 15%다. 이들은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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