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잘하는 한국인들
한국의 역사에서는 거짓말을 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는 백 년 남짓한 기간을 마치 천 년처럼 보낸 숨 가쁜 변화의 시간이었다. 20세기를 앞두고는 국가의 미래를 놓고 개화에서 쇄국까지 수많은 욕망들이 충돌했다. 이윽고 열강들의 침입을 받은 끝에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해방이 된 이후에는 곧 한국전쟁을 겪었고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그로 인한 후유증, 민주화와 외환위기가지 세계의 어느 역사와 비교하더라도 굉장히 가파르게 줄달음쳤던 역사를 겪어야 했다.
누군가 일본에게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했던 거짓말과, 격동의 시기를 욕심껏 헤쳐 나가고자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하여 내뱉었던 거짓말을 모두 인정해야 했다. 한국인들에게 현대사란 그 자체로 거대한 거짓말과 같았던 시기였고, 수많은 거짓말들에 위협을 받았던 시대였으며, 거짓말을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고 아직도 생존해 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거짓말을 배우고, 누군가를 일단 의심할 것을 배운 자녀들이 지금 한국 인구의 허리를 담당하는 중장년층이 되었다.
적자생존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우리는 속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동시에 속여서 살아남았던 거짓말쟁의들의 후손인 셈이다.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속는 놈이 바보지!”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지금의 세태에는 이와 같은 거짓말에 대한 우리의 역사 속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욕심에 취약한 한국인
“여러분 부자되세요!”
IMF의 충격에 어느 정도 적응한 2000년대 초반 등장한 어느 카드사의 광고 카피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부자가 되기를 대놓고 권유하는 광고가 공중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지자 여러 우려 섞인 비판들이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거북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광고는 대성공이었다. 듣는 사람들이 얼굴을 붉혔던 “부자 되세요”라는 외침이야말로 한국을 지배하는 두 가지 급소를 제대로 건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부에 대한 욕심과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다. 한국인이 거짓말을 잘하는 이유는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잘 속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잘 속는 까닭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욕심이 많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은 이런 한국인의 심리를 똑똑하게 알고 있다. 그들은 “5억 원을 투자하면 몇 달 내로 20억을 벌수 있다”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지금 아니면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고 협박한다. 또 어떤 사기꾼은 “극소수만 알고 있는 정보인데, 지금 이 장외주식이 몇 달 내로 코스닥에 상장된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사람들의 한탕 욕구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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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범죄자들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두 명 이상이 모여 조직적인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치밀하게 각본을 짜놓고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하는 악의적인 거짓말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며 오랜 시간 동안 연습하고 수없이 시험한 끝에 나온 결과일 수 있다. 그러한 준비와 노력 앞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밖에 없다.
그럼에도 상대방의 제안에 욕심이 생기고 마음이 흔들린다면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은 상대방을 시험하는 것이며, 동시에 스스로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돌발적인 질문으로 대화의 흐름이 깨지면서 잠시나마 대화 밖으로 빠져나와 그간의 과정을 되짚어볼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한숨 돌렸다면 그들의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한다. 만약 상대가 노련한 사기꾼이라면 이렇게 분위기가 깨진 다음에는 훗날을 기약하며 물러나거나,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할 것이다. 사기꾼들은 눈치가 빠르다. 그들은 사기 대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자리를 턴다. 큰 노력을 기울여 의심받는 상황을 극복하느니 새로운 상대를 물색하는 것이 사냥에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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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만 배워왔다. 주입식 교육처럼 왜 거짓말을 말아야 하는지. 거짓말을 함으로써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지 등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하고 무조건 거짓말은 나쁜 것이니 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외국의 경우 거짓말에 관한 연구는 물론 대중들의 이해 역시 한국에 비해 상당히 높다. 에를 들어 미국에서는CIA, FBI 기관 출신자들이 직접 거짓말에 대한 전문 교육을 실시한다. 도 그 결과는 곧 대중에게 공개된다. 그러다보니 거짓말에 관한 지식들이 전문가가 아닌 대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고 시시각각 업데이트되는 정보들 또한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거짓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보니 한국인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영악하게 살아야할 줄도 알아야한다는 모순되고 막연하기만 한 잔소리를 교육이라고 착각한다. 거짓말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거짓말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으면 거짓말도 훌륭한 사교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쉽게 속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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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강화, 억제, 가장, 중화라는 네 가지 방법으로 얼굴 표정을 통제한다. 강화는 과장해 표현하는 경우다. 친구가 만들어준 음식이 실제로는 맛이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예의상 호들갑스럽게 ‘정말 맛있다’고 칭찬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억제는 자신의 감정을 표정에서 은근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화가 많이 났지만 그러한 심리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표정을 억누르려는 시도가 이에 해당된다. 가장은 다른 감정으로 대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이 느끼는 분노나 슬픔 등의 감정을 미소로 바꿔 표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화는 무표정에 해당된다.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중립적인 표정을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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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할 때 자주 나타나는 언어 패턴인 말실수는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서다. 거짓말에서 말실수의 발생 비율이 높지는 않지만 거짓말을 할 때는 반드시 한 번쯤 나타나는 언어 패턴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말실수를 두고 ‘억눌러져야 할 생각이 입 밖으로 표출됨으로써 난처한 지경에 이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거짓말을 할 때 말실수로 나타난 단서들은 대부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들 때 돌발적인 질문을 던져 말이 어떻게 꼬이면서 실수가 나오는 지를 살펴보는 것도 거짓말을 간파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김형희 / ‘한국인의 거짓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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