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집에서 자연스레 숨이 잦아들어 죽는 경우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다. 우리는 대부분 집이 아닌 병원의 환자로 죽는다. 사실상 객사인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는 말의 의미는 죽음의 과정이 두렵다는 말과 같다.
병원에서 환자로 죽는다는 건 자연스러운 죽음에서 멀어진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일단 병원에 입원하면 의사들은 환자들의 생사가망 여부를 불문하고 약물을 투약하고, 기도를 절개해 인공호흡기를 달고, 수많은 의학적 조치를 취하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선 잠들어 있는 환자를 일부러 깨워 CT를 찍고, 수없이 바늘을 찔러대고, 피를 뽑는다. 그 모든 검사들은 환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행위들이 환자들을 쉴 수 없게 만들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회복력을 크게 해칠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친할머니 집 옆에는 고조할아버지 무덤이 있었다. 그래서 무덤가 곁의 제비꽃을 꺾고, 낮잠을 잤던 기억이 내겐 생생하다. 이청춘의 소설 <축제>에서 팔순 노모의 죽음은 축제로 승화된다. 집안 식구들과 지인들이 어머니의 치매로 인해 받았던 고통을 회상하면서 묵은 갈등을 해소하고 결국 화해에 이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 문화에는 죽은 자를 애도하고, 산 자를 위로하는 예식이 존재한다. 사람이 죽으면 병원의 영안실이 아니라, 평생을 살던 집의 병풍 뒤에 모시는 게 당연하다고 느꼈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사람들은 사흘 밤낮을 고인이 지내던 공간 안에서 그를 떠나보낼 예식을 치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위로의 축제가 사라졌다.
내 친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자신의 병명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가족들은 위암 3기라는 병명이 할아버지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 그것을 철저히 숨겼다. 의사는 환자의 희망을 꺾지 않기 위해 최대한 환자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한 건, 만약의 의학적 분쟁을 위해 의사가 환자의 보호자들에겐 최악의 상황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자와 가족, 의사와 가족 사이에 많은 오해와 불신이 쌓인다. 할아버지는 결국 온갖 항암 치료 후 돌아가셨지만, 어린 나는 그때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리 가족들의 선의라고 하지만, 자신을 덮친 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채 죽어간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만약 처음부터 의사가 할아버지에게 정확한 병명과 예후에 대해 설명해주셨더라면, 할아버지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매튜의 죽음을 보면서 나는 내 숨이 사라지는 마지막을 생각했다. 나는 인공적인 생명보조 장치를 매달고 병원에서 내 삶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가망 없는 치료에 매달리기보단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면, 내 삶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다 가고 싶다. 물론 사람을 끝까지 살리고 싶어 하는 의료진들의 선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의료진이 말하는 호전이 환자의 가족이 기대하는 호전과 많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이제는 안다. 예를 들어, 의사들이 말한 호전은 눈을 뜨고 일어나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닌, 자가 호흡이 불가능한 혼수상태에서 자가 호흡이 가능한 식물인간 상태를 의미하는 것에 그칠 수도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무엇이 인간답고, 무엇이 나다운 마지막일까. 일본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간 이후, 이렇게 말했다.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을 가장 열심히 살아간다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은 정확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장 진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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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웃는 할머니로 늙는다는 것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를 읽다가 “이런 할머니라면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암이 생긴 후, 배용준이 나온 한류 드라마에 빠져 남이섬에 관광까지 왔던 한류팬 사노 요코, 그녀는 일본의 대표적인 삽화가로, 역시 일본의 대표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이었다.(그녀는 두 번 이혼했다) 나는 일본 아줌마들이 왜 그렇게 배용준에게 빠져들었는지 늘 궁금했는데, 그녀의 책을 읽고 마침내 궁금증을 해결했다.
“나는 일본 아줌마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다. 선전에 휘둘린 것도 아니고, 잘난 평론가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도 아니다. 아줌마들은 스스로 한국 드라마를 발견했고, 땅속 마그마처럼 쓰나미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한류를 뛰웠다. 그러고는 창피고 체면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흠뻑 빠져서 일본을 바꾸어 놓았다. 아줌마는 자각이 없다. 미처 다 쓰지 못한 감정이 있던 자리가 어느새 메말라버렸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서야 그 빈자리에 감정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한국 드라마를 몰랐다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인생이 다 그런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브라운관 속 , 새빨간 거짓말에 이렇게 마음이 충족될 줄 몰랐다. 속아도 남는 장사다!”
솔직하고 담백하지 않는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도 기꺼이 속아주는 마음 말이다. 그런 그녀가 암 진단을 받는다.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삶이 2년 정도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병원에서 환자로 살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깊이 있게 즐기기로 결정한다. 인공적인 연명술이나 항암제 투여를 거부한 그녀는 통증을 관리하기 위한 진통제만 투여 받으며 자신의 일상을 산다. 죽음에 대한 태도도 보통 사람들과 참 많이 달랐다.
“암은 좋은 병이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병문안 오는 사람들이 멜론 같은 걸 사온다. 나는 또 굴뚝이 되어 있다. 제아무리 애연가라도 암에 걸리면 담배를 끊는다지. 흥, 목숨이 그렇게 아까운가?”
사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사노 요코가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재규어를 사는 장면이다. 마치 슈퍼마켓에서 초코릿 한 봉지를 사는 기분으로 말이다. 물론 산 지 일주일 만에 재규어는 주차 미숙으로 여기저기 긁히고, 줄기찬 새똥의 공격으로 똥차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암이 생기자 그녀는 해보고 싶었던 일을 죄책감 없이, 마음껏 해버린다.
늘그막에 찾아오는 암이 역설적으로 축복일 수 있다고 내게 말해준 사람은 LA에 사는 언니였다. 그녀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암으로 떠나보낸 마지막 일 년 동안의 일을 내게 자세히 얘기해주었다. 언니는 길을 걷거나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느닷없이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는 뇌혈관 질환과 다르게 암은 최소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암이 착한 병이라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전철을 타면 예쁘고 젊은 여자 옆에는 반드시 할아버지가 서 있다는 문장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지하철 안을 관찰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들은 그녀의 말처럼 내 옆이 아니라, 젊고 예쁜 여자 옆에만 서 있지 않는가! 할머니가 되면 나도 이 정도의 통찰력은 얻고 싶다.
백영옥/‘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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