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풀꽃도 꽃이다

송담(松潭) 2016. 8. 17. 16:02

 

 

 

풀꽃도 꽃이다

 

 

 

 

 

 

 

 

 

 

 

< 1 >

 

 

 나는 오늘도 자살 사이트에 들어갔다. 나는 이 시간이 무지 겁나고 무시무시하다. 날마다 죽 싶은 사람들의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글들은 그냥 글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도 나고 피 냄새도 난다. 그리고 귀신 울음소리도 들린다. 그렇게 끔찍스러운데도 매일 안 들어오고는 견딜 수가 없다. 나도 죽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 들어오면 꽉 막히고 꽉 눌린 것 같은 답답함과 갑갑함이 좀 풀리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캄캄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좀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다. 엄마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이 여기 있다. 엄마는 죽어도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맘에 맞는 사람 몇을 구하게 되면 그날이 내가 떠나는 날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글을 올리지 못했다. 문구는 와따로 멋지게 짜놓았는데 자판을 두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용기만 없기 때문이 아니다. 마음 한쪽에는 죽고 싶은 마음과 똑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다. 그렇다. 정말이지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다. 내가 죽으려고 하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무서운 독재자다. 히틀러처럼 인정사정없는 독재자다. 엄마는 나를 서울대학교에 넣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다. 그래서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묶어놓고 눈만 뜨면 공부! 공부! 공부!를 외치며 윽박지르고 몰아댄다.

 

 엄마는 나를 보기만 하면 쉴 새 없이 하는 말이 공부다. 엄마는 공부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 같다. 빨리 빨리 공부해! 더 공부해!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해! 딴생각하지 말고 공부해! 벌써 공부 다 했다구? 지금 공부하니? 공부밖에 믿을 게 없어. 공부 안 하면 찌질이 쪼다 돼! 그러다 언제 공부 할꺼니!

 

 이 똑같은 말이 너무너무 지겹고 지긋지긋해 이제 미쳐버릴 것만 같다. 나는 이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말을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듣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학년이 바뀌는 것에 따라 점점 심해져 갔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서 훨씬 더 심해지자 나는 엄마가 내 엄마 같지 않았고, 싫어지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덤벼들고 싶었고, 마구 소리 질러대고 싶었고, 무엇이든 내던져 박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아빠는 무지 기운이 셌다. 그리고 언제나 엄마편이라서 무서웠다. 아빠는 팔씨름을 할 때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 두 개만으로도 나를 거뜬히 이겨버렸다. 그런 주먹에 한 대 얻어걸리면 골로 갈 게 뻔한 일이었다.

 

 엄마가 그 다음으로 신나서 하고 또 하는 말이 있다. 어쨌든 서울대학교에 붙어야 한다. 그래야 인생길이 고속도로가 된다. 서울대학교만 나와봐라, 세상사람 모두가 기죽고, 척척 알아준다. 서울대학교를 나와야 큰소리 떵떵 치며 부자로 편하게 산다. , 무슨 수를 써서든 서울대학교를 나와야지. 그래야 쉽게 출세하고 큰 권세 잡는다. 엄마가 이런 말을 하고 또 하면서 내가 갈 대학을 서울대학교 법대로 딱 정해버린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한테 목 조이며 빡세게 공부해야만 했다. 엄마는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아빠는 서울대를 나와 대기업에 근무하니까 돈벌이는 잘하는데 너무 기업주 앞에 기죽고, 세상이 알아주는 권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넌 판검사가 되면 누구 앞에서나 뻐길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되고, 부잣집 딸들이 줄을 서니까 저절로 부자가 되니 얼마나 좋으냐는 거였다.

 

 엄마 말은 아주 듣기 좋았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주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는 서울대학교를 갈 머리가 못 되었다. 엄마는 그 중요한 것을 모르고 혼자 신나서 헛꿈을 꾸고 있었다.

 

 서울대학교는 머리가 최상급인 애들만, 전두엽이 금수저인 애들만 갈 수 있는 대학이었다. 키가 조금 작아도 달리기를 유난히 잘하는 애가 있고, 말소리는 별로인데 노래를 기똥차게 잘하는 애가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런 애들은 당할 수는 없다. 공부도 그렇다. 공부가 그냥 저절로 되는 애들이 있다. 영어 단어를 종이에 두 번, 세 번 쓰지 않고 그냥 똑바로 쳐다보기만 해도 머리에 쏙쏙 들어가는 애들이 있다. 그런 애들이 머리 좋게 태어나서 공부를 쉽게 잘하는 애들이다. 공부가 재미있어서 한다는 애들은 한 반에 한두 명 정도씩 있다. A급 애들이 서울대학교를 가는 것이다. 그 아래 영어 단어를 두 번, 세 번 써봐야 머리에 들어가는 B급이 있고, 네 번 다섯 번 써야 하는 C급이 있고, 여섯 번 일곱 번 써야 하는 D급이 있다.

 

 나는 B급 정도일 뿐이다. 그런데 엄마는 그걸 모른다. 내가 A급이라고 딱 믿고 있다. 그러고는 날마다 학원 뺑뺑이를 돌려댔다. 그러나 그건 아까운 돈만 없애는 헛수고고 바보짓이다. 내가 한숨도 안 자고 매일 24시간씩 공부를 해도 저절로 공부가 되는 A급 애들은 영원히 따라 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애들도 고액 과외를 빡세게 해대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걸 모른다. 그 차이를 모르고 자기 아들이 머리 좋다고 생각하고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만 외친다.

 

 엄마한테 그 사실을 알려 줄 수도 없다. 엄마는 믿지 않을 것이고, 공부하기 싫으니까 쌩깐다고 들입다 쿠사리나 먹을 것이다.

 

 그리고 판검사라는 것도 그렇다. 나는 그게 싫다. 엄마가 보여준 법전이라는 건 국어대사전만큼 두꺼웠는데, 그 안에 가득 찬 법들을 달달 외워야만 사법 고시에 합격한다는 것이었다. 아아, 나는 그게 가위눌린다. 나는 외우는 게 안전 싫다. 그래서 꼬박꼬박 단어를 외어야 하는 영어도 짜증나고 성적도 잘 안 오르는 것이다.

 

 엄마는 그런 것 하나도 모르면서 나한테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고 엄마 마음대로 이것저것 다 정해버린 것이다. 그게 말이 되냔 말이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아빠다. 무조건 엄마 말에 좋아좋아 찬성을 해버리는 것이다. “좋지 좋아! 우리 아들이 서울대학교 나와서 판검사 나으리 되시면 가문의 영광이 되고, 이 아빠 체면 쫘악 서고,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 그래 우리 아들 힘내서 열심히 해라. 아빠와 아들이 서울대학교 출신 동문이 되는 거, 그것 참 폼나고 낯 서는 일이다. 지원아, 가문의 영광을 만들어라.” 아빠가 술 취해 이렇게 외쳐될 때면 더 죽고 싶어진다.

 

 그런데 또 하나 신경질 나는 게 있다. 누나 얘기다. “딸은 이대에 척 합격시켜 부잣집에 시집가 편히 살게 내 할 일 절반은 성공시켰다. 너도 누나처럼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열심히 해. 서울대학교는 문제없으니까. 아빠 서울대학교, 아들 서울대학교! 이보다 더 보기 좋고 멋진 그림이 어딨냐. 넌 아빠 머리 닮았으니까 서울대학교 합격은 틀림없어.” 엄마는 이런 말을 할 때는 너무나 신바람이 난다.

 

 그러나 엄마는 이것도 잘못 알고 있다. 나는 아빠 머리를 닮은 게 아니라 보통 대학을 나온 엄마를 닮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영어 단어를 두세 번씩 써야 하는 B급 아닌가.

 

 나는 판검사가 되기 싫은 대신 딱 되고 싶다는 게 없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다. 다른 아이들도 거의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직 중3일 뿐이다. 나는 기막히게 멋진 영화를 보면 영화감독이 되고 싶기도 하고, 전혀 미남으로 생기지 않고 평범한 얼굴인데 눈물나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보면 배우가 되고 싶기도 하고, 환장하게 갖고 싶은 멋진 자동차를 보고 있으면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기도 하고, 스릴이 기막힌 컴퓨터 게임에 취하다 보면 게임 설계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여행비를 벌어가며 세계 일주 여행을 한 얘기를 텔레비전에서 보다 보면 그런 여행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 내마음을 나도 모를 만큼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엄마 앞에서는 그런 마음을 꽁꽁 숨겼다. 엄마가 알면 죽이려고 할 테니까.

 

 내가 끔찍스럽고 무서운 건 중3인 지금도 숨 막히게 하는데 앞으로 고등학생이 되면 얼마나 더 심해질까 하는 걱정이다. 생각만 해도 몸이 오그라들고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지금보다 더 심하게 당하면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 지금보다 더 심한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죽을 수밖에 없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나를 감시해 왔다. 딴짓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밤중에 공부를 하다가 뒤가 이상해서 돌아보면 소리 없이 열린 문 사이에 엄마의 얼굴이 끼어 있곤 했다. 그럴 때 얼마나 심하게 놀라는지 모른다. 그럴 때 엄마의 얼굴은 엄마가 아니었다. 무슨 무서운 괴물 같기만 했다. 앞으로 엄마가 점점 더 무섭게 변해가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니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죽어야 한다.

 

 그러나 죽으려고 생각하면 이 나이에 죽는 게 너무 억울하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지도 못하고 죽는 게 정말 억울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다. 그러나 독재자 엄마가 그걸 허락할 리 없다. 그러니까 죽어야 한다.

 

 나는 죽는 게 무서워서, 살고 싶어서 오늘도 사이트에 내 글을 달지 못하고 물러난다. 나는 살고 싶다. 근데 엄마가 사자처럼, 악마처럼 무섭게 버티고 있다. 그러나 죽어야 한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아빠는 돈만 열심히 벌어 엄마한테 바치는 찌질이일 뿐이고, 누나는 남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 세상에 나 혼자일 뿐이다.

 

 

 

 

 

< 2 >

 

 “공부 때문에, 성적을 비관해 자살하는 애들이 1년에 얼마인 아십니까?”

 

 “ 연간 500명을 넘어 하루 평균 1.5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애들을 죽게 한 게 누구입니까?”

 “그 위대하고 거룩한 모성입니다....”

 

 “그 심각한 사태를 사교육없는세상의 윤지희 공동대표가 어떤 강연에서 정확히 밝혔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성적 비관으로 자살한 학생이 8천여 명이었습니다. 연평균 533명인데, 지난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위 군인들이 5,099명으로 추산된다고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15년 동안 그보다 숫자가 줄어들까요? 사교육비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건 경쟁이 그만큼 치열해지고 있다는 증거니까 더 말할 필요 없겠죠.”

 

 일류대학교 철학 교수를 하다가 농사꾼으로 돌아서 변산공동체학교를 열어 아이들과 함께 낙원을 꾸미고자 하고 있는 윤구병 선생도 어느 강연에서 아이들을 구곳, 속박해서 죽음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우리나라의 비인간적인 교육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손발을 묶어놓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시절에 로마 교황청이 반란군들을 잡아다가 손발을 묶어 놨어요. 그렇게 죽인 것이었죠. 우리 아이들이 지금 교실에서 열 시간, 열두 시간 동안 묶여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교육자들은 교육의 이름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건 유대인의 집단 핚살보다 훨씬 큰 범죄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이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엄마들은 내 자식만 탈나지 않으면 상관없다’, ‘내 자식에게 무슨 일이 날 리 없다하는 무모함으로 무한 경쟁의 질주에 열을 올리느라고 딴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참 대단들 하십니다.

 

 

 

 조정래 / ‘풀꽃도 꽃이다1’중에서

 

 

< 3 >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출석부라는 죄수 명단에 올라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공부라는 벌을 받고

 졸업이라는 석방을 기다린다.

 

 예로부터 세태를 풍자하는 얘기나 노래는 으레껏 그 출처가 모호하고 안개 속에 가려져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세태의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움으로 세상 사람들이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 애들이 부르는 노래도 소름 끼치게 끔찍스럽긴 했지만 그런 만큼 아이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기들의 괴로움과 고통스러움을 어디에 하소연 할 길 없는 아이들이 그 노래를 불러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었다.

 

 

< 4 >

 

학원가기 싫은 날

                                                                          이순영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를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며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시를 쓴 이순영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 시는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이 그 누구나 한 번 읽으면 그 내용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는 시다. ‘아아, 이렇게 학원 다니기가 지긋지긋 하구나’, ‘엄마들이 얼마나 심하게 몰아대면 이렇게까지 썼을까’, ‘정말 애들을 이 지경이 되게 만들어서는 안 되겠구나.’ 시를 읽고 나면 금방 이런 느낌이 들고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반응일 것이다. 그만큼 그 시는 아무런 꾸밈이나 가식이 없이 동심의 순수함과 솔직함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그런데 모든 매스컴은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정반대의 반응을 나타냈다. 먼저 시와 삽화에 대한 혐오감을 있는 힘껏 표출하며 비판을 시작했고, 그다음에 그런 책을 발행한 출판사의 신중성 없음과 도덕성 결여를 거론함과 동시에 그따위 자극적이고 저질의 글을 가지고 돈을 벌려고 하는 천박한 상업주의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리고 끝으로 억지 공부에 항의한 열 살짜리 어린이를 인정사정없이 패륜아로, 사이코패스로 매도해 댔다.

 

 그 무시무시한 매스컴의 공격에 혼비백산한 출판사는 이것을 보고 시대의 슬픈 자화상을 발견하고 어른들의 잘못된 교육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는 한마디를 겨우 하고는 3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유통 중인 시집 전량을 회수하고 재고 도서도 전량 폐기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런 끔찍한(?) 시가 나타났으면 매스컴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꽃다워야 할 소녀의 마음에서 왜 이런 시가 나왔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단계적 접근을 해야 한다. 그리고 공부하는 자식을 둔 모든 부모들은 내 자식도 그런 시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깨달음으로 함께 마음을 합쳐 그 뿌리를 파내는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매스컴은 그 어린 소녀를 무자비하게 패륜아’, ‘사이코패스로 모는 언론 살인을 감행했고, 공부하는 자식을 둔 부모들은 내 자식만 안 그러면 돼하는 이기주의로 그 소녀를 암매장하는 데 가담했다.

 

 

< 5 >

 

 

 그 거침없는 질주가 바로 무작정 학원 보내기였다. ‘남들보다 먼저 하면 이길 수 있다!’ 부모들의 이 기대와 믿음을 확실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학원에 있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선행 학습이었다. 그것은 남들보다 먼저 해서 꼭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을 딱 받아 남들보다 먼저 가르쳐주는 것이니 그보다 잘 어울리는 찰떡궁합은 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교육을 1퍼센트나, 10퍼센트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의 경우 100퍼센트이니 선행 교육은 선행이라는 의미는 완전히 상실하고 완행 교육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학원들만 배불려주는 부모들의 어리석은 탕진과 고맙다는 소리 듣지 못하는 자선을 베풀며 애들만 학대하는 잔혹극이 계속 공연되는 것이었다.

 

 아까운 돈을 맥질한 선행 교육은 아이들도 학원 교육도 함께 망치는 탁월한 효과를 나타냈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누구나 방학 때 다음 학기에 배울 내용을 선행 학습으로 미리 배우게 된다. 그다음에 새 학기가 돌아오면 학교에서 두 번째로 다시 배우게 된다. 그런데 학원을 계속 다니고 있으니까 학습의 반복 효과를 위해서 세 번째로 복습을 하게 된다. 그런 다음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다가오면 다시 총복습을 실시해 네 번째 반복을 하게 된다.

 

 그렇게 네 번씩이나 되풀이되는 반복 공부는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하고 싶어서 하는 능동적인 반복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그런 수동적 반복은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집중력을 저하시키고 공부를 지겨워하는 역효과를 나타낼 뿐이었다.

 

 이렇게 선행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아이들은 당연히 학교 공부를 하나마나 한 것으로 우습게 여겼다. 그래서 언제나 절반 이상이 수업 시간에 선생 예기를 듣지 않고 학원 숙제를 하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책상에 엎드려 심야삼경이었다. 그 아이들은 집에서 학원 숙제를 하느라고 잠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학원 숙제는 하루 평균 다섯 시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아이들은 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집에서 학원 숙제를 한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고, 집에서 잔 아이들은 학교에서 학원 숙제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엄연한 현실 앞에서 교사는 속수무책이었다, 절대다수의 부모들이 사교육을 절대 신뢰하는 한 그들이 자기들 돈들이고 선택한 길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학교는 사교육 복습장이나 숙제장으로 바뀌고, 주기적으로 사교육 효과를 평가해 주는 시험장으로 전락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선생들 입에서는 너희들 학원에서 다 배웠지?’하는 말이 쑥쑥 나오기도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매스컴에서는 공교육의 포기공교육의 와해하며 유식한 말로 장식해 공격하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현장 교사들이 교육을 포기하거나 무책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교육 광풍이 공교육을 초토화시키는 것을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고 힘도 없는 교사들이 토해내는 자조의 한숨이고, 절망적 탄식이었던 것이다.

 

 

< 6 >

 

 코스모스가 피면서 여름이 가고, 들국화가 피면서 가을이 왔다. 코스모스가 지면서 가을이 깊었고, 들국화가 지면서 낙엽이 덜어지기 시작했다. 그 시간의 흐름을 따라 교정의 무성했던 느티나무 잎들도 가을빛을 머금다가, 황금빛으로 물들다가, 이제 서늘한 바람결을 타고 잎들이 분분히 낙엽지고 있었다.

 

 깔깔하면서 청결한 느낌의 느티나무 단풍이 바람결을 타고 흩날리며 떨어지는 모습은 가을 정취의 절정이었다. 슬픔이기도 하고, 사무침이기도 하고, 서러움이기도 하고, 고적함이기도 하고, 그리움이기도 하고, 허무이기도 하고, 텅 빈 공허이기도 한 그 감정. 그건 깊은 사색의 길이고, 자아 발견의 여로이기도 했다.

 

 강교민은 창가에 뒷짐을 지고 서서 그 낙엽 흩날리는 정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이 만들어내는 침묵에 학생들도 조용히 창밖 멀리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가을 국어 시간다운 고요가 교실에 가득했다.

 

 “여기 있는 시들을 돌아가면서 한 편씩 낭송한다. 시는 읊는 것이다. 소리 내어 몇 번씩 읽으면서 그 의미가 마음에 젖어들고, 읊을수록 그 의미가 더욱 깊게 마음에 아로새겨지고, 문득문득 무의식 중에 읊조리게 되는 시, 그리고 평생 마음에 간직하게 되는 시, 그런 시가 좋은 시고, 명시다. 여기 있는 시들은 그런 시라고 생각해 선생님이 고른 것이다.

 

 공부에 시달리고, 앞길이 불안하고, 희망보다는 절망 쪽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청소년 시정f의 여러분들에게 꼭 어울리는,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는 시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우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들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낙엽은 서늘한 바람결을 타고 쉴 새 없이 흩어져 날리고, 그 고운 잎들의 현란한 난무 사이사이로 시는 흐르고, 예리한 감수성이 번뜩이는 열여덟 청춘들은 시심에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 7 >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우리 창배, 많이 피곤한 모양이지?”

 강교민은 김창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에, 선생님 죄송합니다. 안 졸려고 기를 썼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편의점에서 조는 것 CCTV에 찍히면 한 번에 벌금 10만 원씩 까거든요.”

 그래서 한숨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는 김창배의 말이었다.

 “괜찮아, 그렇게 고달픈데 어떻게 낮에 잠을 안 자고 배기겠니, 어떻게 돈은 제대로 받고 있니?”

 “, 아침마다 받아서 퇴근해요.”

 “다행이다. 임금 제대로 못 받아 말썽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우리 쥔아저씨는 그래도 마음이 좋은 편이예요. 자기도 어려서 고생고생하면서 살았다고 폐기(유통기한이 지나서 버리는 식품)로 저녁을 때우게 해주기도 하고 그래요.”

 “폐기 그것 조심해야지 잘못 먹었다간 큰 탈난다.”

 “괜찮아요. 고급으로 먹고사는 잘사는 애들이야 탈나지, 우리처럼 가난해서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고사는 찌질이들에게는 탈도 도망가나 봐요. 어차피 배속이 지저분하고 쓰레기통이라 좀 기간 지나고 상하고 어쩌고 한 것들이 들어와도 맥을 못 써요.”

 김창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했다.

 강교민은 가슴이 찡 울렸다. 김창배는 자신의 아들 호준이와 동갑이고 같은 고2였다. 그런데 그런 쓰라린 말을 예사로 하고 있었다. 가난이 비천을 습관화하게 했고, 가난이 체념을 일상화시켰고, 가난이 나이에 안 어울리게 철들게 한 것이었다. 아내는 호준이에게 유통기한이 당일인 음식도 먹이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판이었다.

 “창배야, 가난하다고 아무거나 먹고 살라는 법은 없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꼭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누구나 한 번 태어났고, 누구나 한 번 죽고, 누구나 목숨은 하나라는 것이다. 누구나 하나뿐이기 때문에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 아니냐. 그리고 말이다. 가난한 사람한테는 몸뚱이가 전 재산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 그러니까 늘 건강에 조심해야 한다.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겠지만 그래도 먹는 것을 늘 조심해야 한다.”

 

 청소년 알바는 전국적으로 어림잡아 23만에서 25만 명 정도였다. 그 많은 임금을 어떤 기관에서 나서서 법에 정해진 대로 어김없이 지급하도록 감시 감독한다면 어떻게 될까. 청소년들을 고용해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영세상인들 중 무척 많은 수가 영업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영세 자영업에서는 인건비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영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되면 그 영향은 바로 일반 소비자들에게 미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최저임금도 안 되는 청소년들의 알바비 덕분에 통 큰 가격이라고 선전해대는 음식을 배달받아 먹고 있는 것이다. 전후의 혹독한 굶주림 속에서 넝마주이라는 가난한 청소년들이 도시의 청결을 해결해 주는 보이지 않는 공을 세웠듯이 오늘의 가난한 청소년들도 법이 보장하는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우리 사회 밑바닥 경제를 그렇게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업주들만 가엾은 청소년들의 노동력을 갈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돈이 돌고 돌 듯 우리 사회, 우리들 모두가 그 갈취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그 어린 청소년들은 어쩌면 나태주 시인의 시<풀꽃>같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조정래 / ‘풀꽃도 꽃이다2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