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질투는 사랑의 최종병기

송담(松潭) 2016. 1. 21. 11:43

 

 

 

질투는 사랑의 최종병기

 

 

 다윈은 질투와 관련된 중요한 경험을 우리에게 이론적으로 제공합니다. 실험대상은 자신의 아들입니다. 15개월이 채 되지 않은 아이 앞에서 그는 정확하게 아이 크기만한 인형을 안고 지나가 봅니다. 그때 그는 아이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를 관찰합니다. 그것은 질투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질투가 애정결핍으로부터 야기된 왜곡된 감정이라거나,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왜곡된 사랑이라는 속설에 대한 반증입니다. 이 경우에는 질투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아이의 생존전략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생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이들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질투에 대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질투란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 가운데 하나로서, 자연선택의 중요한 무기라는 겁니다. 형제가 많은 아이는 본능적으로 질투심이 강합니다. 맛있는 것을 더 얻어내기 위해 부모에게 때를 쓰는 것도 질투의 일종입니다. 이 전략적 행동은 부모가 아이에게 공평하게 자신의 관심을 나눠줄 때까지 지속됩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본능적 행위입니다.

 

 진화생물학적 설명은 남성과 여성이 보이는 생물학적 사랑법의 차이를 설명한적 있습니다. 유전자에 빗대서 말입니다. 남성의 사랑은 자신의 우성인자를 남기려는 본능과 연관이 있다고 생물학은 증언합니다. 남성이 여성의 외모에 집착하는 것은 그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본능적 이끌림인 것이지요. 반면 여성은 연인의 사회적 조건을 통해 양육에 대한 부담과 책임의 무거움에서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려고 노력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질투는 남성에 비해 훨씬 강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인의 질투는 한이 없고,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설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한이 맺혀 눈을 감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도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요?

 

 생물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견해는 오해이자 편견에 불과합니다. 가부장적 사회가 빚어낸 성적 이데올로기일수도 있습니다. 잔인하기로 따지면 여성은 남성을 따라갈 수 없지요. 생물학적 연구는 단지 여성의 질투가 남성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여성도 자신의 연인이 다른 여성을 바라볼 때 질투를 느낍니다. 여성은 자신이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유전자가 누구의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성의 질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성은 남성의 시선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다른 여성에게 옮겨지고 있을 때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입니다. 연인으로부터 제공받고 있는 사회적 울타리를 타인과 나눠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불안케 하는 겁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신의 연인이 다른 남성과 실제로 성적 관계를 맺었을 때 분노를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는 다소 달리 나타납니다. 연인의 성적 외도에 있어서는 비교적 관대한 반응을 보이지만, 정서적인 교감에는 심한 상처와 모멸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결국 생물학적 인간은 질투를 자연의 한 조각으로 이해합니다. 자연은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동안 철학적 상상력과 심리학적 분석이 이 자연적 감성을 윤리적 규범에 묶어두고 고삐를 채우려고 했다면, 생물학은 이제 질투를 인간 진화의 한 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질투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일탈행위에 대해 경고하는 역할을 하며, 서로의 헌신을 안정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 진화의 비밀병기인 셈입니다.

 

김종엽 / ‘철학특강중에서

 

 

사진출처 : 일간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