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라는 폭풍 속으로
짐승들은 물론 말을 하지 않는다.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말이란 인간사회의 유산인지라, 남녀의 지성소에서 말을 쓴다면 옷입은 채로 욕탕에 들어서는 꼴이 될 것이다. 성(性)의 성례전(聖禮殿)에선 이런 옷을 벗어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으로, 또는 ‘동물’로 마주할 때라야 권태로운 익숙함에서 벗어나고, 창조주가 우리 몸 안에 숨겨놓은 거친 에너지를 쏟아 놓게 된다.
이것이 본래의 ‘성(性)’아니겠는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감성), 말을 주고받아서(이성) 의사를 타진하는 게 아니라, ‘옷을 벗고 낯선 사람이 되어 거친 에너지를 쏟아 내는 것’말이다. 그것을 우리는 ‘본성(本性)’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순간에 세상에서 주워들은 일체의 개념이 머릿속으로 드나들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곧, 생각이 아닌 온전한 ‘감각’으로 하라는 거다. 이렇게 에너지를 저수지에 가득 찬 물처럼 머금은 채, 말이나 생각을 쓰지 말고 감각대로만 내버려두면 이제껏 하지 않던 행동으로 옮겨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문명의 찌꺼기인 관습과 부자연에서 해방되는 경험이요, 짐승과도 같이 찰라나 순간을 사는 경험이다. 이런 상태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육체를 탐험하면, ‘무시간’이 무엇인지, ‘두려움 없음’이 무엇인지 영혼이 알아차리게 마련이다. 서로가 가쁜 숨결만으로 방안을 채우고 원초적인 돌풍이 몰아 칠 때 창조적인 ‘혼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차츰 낯설고 신비스러운 에너지의 육화가 지각을 통해 전달이 된다. 단순한 운동에너지가 거룩한 에너지로의 전환 말이다.
이렇게 일상의 익숙함을 한 꺼풀 벗고 나면 ‘존재의 신화적 차원’이 열리게 된다. 이제 눈을 크게 뜨고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게 될 때, 우주가 나를 통해 그 자신과 상봉하는 신비감이 동트게 되는 것이다. 차츰 이런 의식에 도달한 존재는 피곤과 조급과 권태에서 해방되어 강물처럼 흐르는 에너지에 파묻히게 된다.
이것이다.
생물학적 ‘성(性)’에너지를 ‘성(聖)’으로 바꾸는 길 말이다.
허태수 / ‘내 생각에 답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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