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성철 탄생 100년

송담(松潭) 2012. 3. 12. 11:22

 

성철 탄생 100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19931110일 해인사에서 거행된 성철 스님의 다비식에는 30만여명이 몰렸다. 88고속도로 고령 IC부터 해인사 IC까지 10는 늘어선 차량들로 거대한 주차장이 됐다. 차들이 꼼짝 못하자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걸어서 다비장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은 1981년 조계종 최고지도자인 종정에 추대된 후에도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며 산문 밖 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국민선승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중생들로 일대가 마비됐다.

 

 어제는 성철 스님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단번에 깨우쳐 더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한 대표적 선승이다. 조계종은 스님을 기리기 위해 올해부터 입적 20주년이 되는 내년까지 세미나, 전시, 행적지 순례 등 추모행사를 이어간다.

 

 세상에 나서기를 꺼리던 스님이었지만 1981년의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일반인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산은 소주요 물은 셀프로다” “뛰는 놈은 뛰는 놈이요 나는 놈은 나는 놈이라는 패러디가 나올 정도였다. 스님은 범은 숲에 있어야 사람이 무서워하고 창경원 범은 아이들 노리갯감일 뿐이라며 10년 동안 철조망을 암자 주위에 두르고 자물쇠를 채워 스스로를 가둔 뒤 내가 세상을 가두었다동구불출(洞口不出)’ 수행을 고집했다. 잠잘 때 눕지 않고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8년간 실천했다. 스님은 제자들을 곰새끼야!”라고 친하게 부르면서도 밥도둑놈, 밥값 내놔라고 일깨움의 질책을 자주 했다. 자신을 만나려는 사람들에겐 절돈 3000원을 내놓으라며 부처님께 3000(절돈 3000)를 올리는 게 더 의미 있다고 했다. 1978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구마고속도로 개통 때 해인사를 찾았지만 성철 스님의 3000배 조건 때문에 만남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뭐꼬를 화두로 자신을 바로 보라고 강조한 스님은 세상에는 돈병, 색병, 이름병이 있고, 그중 가장 무서운 것이 이름병이라며 유명의 허망함에 매달리지 말고, ‘손해보는 것이 이익인 삶을 살라고 했다. 두 벌의 누더기 옷으로 40여년을 지낸 스님은 열반의 순간에도 잘하그래이라는 한마디만 남겼다. 고단한 소통과 화려한 웃음이 넘쳐날수록 큰스님의 손해보는 정신이 진한 울림을 준다.

 

유인화 / 논설위원

(2012.3.12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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