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얼마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송담(松潭) 2012. 1. 21. 05:59

 

 

얼마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지난 한 달여간 중학교 때부터 함께 몰려다니던 가까운 친구들의 부모님께서 연달아 돌아가셨다. 학창 시절 예고도 없이 갑자기 몰려가도 늘 반갑게 맞아주시던 그 환한 웃음을 이제 더는 뵐 수 없다는 것은 못내 아쉽지만, 대부분 여든 남짓 사셨으니 기대 수명을 다 채우고 가신 비교적 행복한분들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늙은 것을 한탄하지 마라, 수많은 사람들은 그 특권조차 누리지 못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삶이란 왜 영원할 수 없는가 묻는다. 하지만 생명의 가장 보편적인 특성이 바로 한계성이다. 적어도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의 생명체는 누구나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영생은 진시황만의 꿈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종교가 다 유한한 생명에 영생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복제인간의 탄생이라는 가공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배아 연구를 엉거주춤 허용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영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생물인구통계학자인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의 저자 올샨스키는 1년 전 나의 하버드 대학 동료이지 유명한 노학자인 스티븐 어스태드와 인간의 최대 수명을 놓고 공개적으로 내기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세한 내기 내용은 당시 우리나라 일간 신문에까지 소개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어스태드는 앞으로 150년 안에 150세까지 사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한 반면, 올샨스키는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올샨스키에 의하면 인간의 기대 수명을 85세 이상으로 늘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20세기 초 미국인들의 기대 수명은 45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공중위생과 의학의 발달로 사망률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불과 100년만에 78세로 늘었다. 하지만 이제 사망률을 줄여 기대 수명을 늘리는 것은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50세 이전에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대 수명은 겨우 3.5년밖에 늘지 않는다고 한다.

 

(...생략...)

 

 병을 안고 그저 오래 살기만 한다고 좋을 리 없다. ‘건강 악화와 수명 연장을 바꾼 거래는 결코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수명 연장이 아니라 성공적인 노화이다. 이른바 건강 수명을 늘려야 한다. 80세든 150세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질병이나 노쇠에 시달리지 않고 정력적으로 살다가 어느 날, 별 고통 없이 훌쩍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아침에는 마지막으로 화끈한 섹스도 한 번 즐기고 말이다.

 

최재천 / ‘통섭의 식탁중에서

 

 

 

해탈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쓰면 안 되겠지만,

정말이지 나는 웬만한 일에는 초월한 느낌으로 산다.

분명히 포기는 아닌데 손을 다 놓고도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나의 모든 상황에서 온 힘을 다하고 즐기며 사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아름답게 가면 된다.’ 

 

- 과학자의 서재중에서